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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38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지역과 참여 유생을 보면 서원훼철반대만인소에는 23개 지역에 107명이, 척사만인소에는 59개 지역에 252명이 참여하였다. 척사 만인소에 두 배가 넘은 지역과 유생이 참여하여, 가히 전 영남이 참여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서원의 복설을 통한 위정보다 는 외세에 대한 척사가 더 큰 명분을 제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원훼철반대만인소는 훼철이 몇 단계로 나누어져 진행 됨으로써 이미 훼철되었던 미사액서원들의 복구가 현실적으로 불 가능해짐에 따라, 그리고 훼철의 대상에서 빠진 사액서원 관련 지역 과 인사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14) 여기에 대원 군의 회유와 탄압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영남에 전달되고 있었던 것도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을 개별 지역으로 나누어 볼 때, 주로 안동‧상주권 이 중심이 되고 있지만, 예안과 영주‧의성 등지에서는 척사만인소 시에 배정된 유생에 비해 더 많은 소유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 나 진주에서는 안동과 같은 규모의 유생이 배정되었으나 겨우 2‧3 명이 참여하였고, 북인들의 한 근거지였던 산청에서는 아예 한 명 도 참여하지 않기도 하였다. 이것은 이 같은 위정척사운동이 안동 을 중심으로 한 경상좌도와 남인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이었 을 것이다. 따라서 우도와 북인들의 참여는 극히 한정적이었다. 영남 의 노론 또한 마찬가지였다. 노론의 대학자인 김평묵金平黙은 영 14) 이수환, 앞의 논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