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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장 민주화운동  시기의  안동정치 339 1편 정치 비용과 시간을 줄이는 동시에, 소비를 억제하는 ‘검약’과 ‘청빈’의 유교사상을 보급하고, 가계 저축을 증진시켜 외채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했던 수단이기도 했으리라 추론할 수 있다.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는 가정에서 건전한 노동력의 ‘안정적 재 생산’(출산‧육아‧가사노동)을 위한 것이었고, 1970년대 초 유학자 들의 충효사상 재조명 사업을 추진하여 안동을 ‘유교 충효윤리의 본산’으로 육성하기도 했다.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경험을 기 록한 ‘징비록’을 안보의식을 고취하는 고전으로 간주하여 국보로 지정하고 태릉 육군사관학교에 서애기념관을 세운 사업이 상징하 듯, 안동 특유의 ‘유교 윤리’ 전통을 재창조하여 정권과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시킨 ‘군사주의’‧‘영웅주의’‧‘민족주의’의 구성 요소에 편입시키게 된다.4) 이러한 사업은 이후 안동 스스로 ‘한국 정신문 화의 수도’로 자처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4) 안동은 조선후기 이후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재야 영남 남인의 중심 지역 이었다. 그리고 조선후기 노론이 집권하던 세도정치 기간 동안에 중앙 조정 의 그릇된 정책에 맞서 유명한 ‘만인소’ 사건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즉 조선 후기만 놓고 보면 안동의 유교문화는 순응적이지 않고 오히려 비판적이었 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성은 한말과 일제하 혁신유림과 사회운동에서 최고 조에 달하여 근대 민족국가 건설을 위한 반체제 저항운동으로 승화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대일 무장투쟁에 참여했고 일부는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도 했다. 그런데 1970년대 이후 안동은 박정희 정권의 지원과 육성으로 ‘유 교의 메카’로 부상하였다. 이 또한 매우 역설적인 사실이자, 중앙 국가에 의해 ‘윤색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1999년과 2009년 안동에서 아시아적 가치를 옹호하는 국내외 학자들이 유교를 소재로 국제학술회의를 연 것 역시 매우 상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