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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 제1공화국과  4‧19혁명 321 1편 정치 한 사례도 공개하였다.30) 선거가 실시된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 고, 시민들도 부정선거가 명확하게 드러나자 선거 포기를 선언한 민주당의 당사 주변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과 정치깡패들의 폭력으로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다. 3월 17일 이승만과 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고 발표되었으나, 국민들은 아무도 믿지 않 았다. 부정선거와 이승만 정권을 규탄하는 분위기가 높아지는 가 운데 김주열金朱烈 학생의 주검 발견은 4‧19혁명의 새로운 전환점 이 되었다. 4월 11일 그 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의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여기 에 18일 정치깡패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마치 고 귀가하던 고려대생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민의 분 노는 절정에 이르렀다. 결국 4월 19일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이에 맞서 이승만 정권은 오후 1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경비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부산‧대구‧광주 등 4개 도시에도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오후 늦게 경비계엄령이 비상계엄령으로 바뀌면서,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무 30) 「참관인 수도 못 채운 민주당」, 《대구매일신문》 1960년 3월 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