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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 제1공화국과  4‧19혁명 319 1편 정치 자유당은 선거의 사전 정지 작업과 동시에 1959년 6월 전당대 회를 열어 이승만을 대통령 후보로, 이기붕李起鵬을 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자유당은 이승만 대통령이 나이가 많아 재임 중 사망 할 수도 있다는 우려감에서 대통령의 승계권을 가진 부통령을 당 선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사전투표율 40% 완료, 3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자유당의 완장 부대 동원으로 유권자 위협, 야당 참관인 축출, 유령 유권자의 조 작과 기권 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 투표,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투 표함 바꿔치기, 득표수의 조작 발표 등 구체적인 부정선거 계획을 마련하였다. 1960년 4‧19혁명은 대구에서 시작되었다. 2월 28일, 이날은 일 요일이었지만, 대구시내 모든 초‧중‧고등학생은 학교 당국의 지 시에 따라 강제로 등교하였다. 그것은 민주당 정부통령후보의 선 거 유세장에 학생들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들이 대구 시내에서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마라” 고 주장하면서 시위를 벌였다. 이어 3월 서울‧대전‧부산 등지에서 도 학생들이 시위를 일으켰다. 학생들의 주장은 처음에는 구속학 생 석방과 학생의 정치 도구화 금지 등이었으나, 점차 민주주의 수 호와 부정선거 규탄 등의 정치적인 성격으로 바뀌어갔다.27) 2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í��한국민주화운동사��1, 돌베개, 2008, 89-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