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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 제1공화국과  4‧19혁명 317 1편 정치 령이 개헌안 통과를 위해 관권을 동원하고 금품을 살포하는 동시 에 정치깡패와 청년단 등을 동원하여 국회를 위협하는 행위를 격 렬하게 비난하였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에 못지않게 권력 장악에 집착하는 민주국민당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이었다.25) 결국 김시현이 주도한 이승만 대통령의 저격사건은 대통령의 전 횡과 장기집권의 획책, 대통령으로서의 무능력과 자격 부족으로 민생이 파탄되고 국가의 위기 상황이 심화되었다고 인식하면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줄여 말하면, 그의 거사 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다. 일제에 의열투쟁으로 맞섰듯이, 이승 만 독재자를 처단하려 나섰던 것이다. 그러니 독립운동가의 삶이 민주화 투쟁가로 변신, 발전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김시현은 이승만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면 권력 구조를 내각제로 하여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민주애족의 정부를 수립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김시현과 류시태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이후 무기 징역으로 감형되었다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직후에 석방되었다.26) 25) 허종, 「1945~1960년 김시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과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 건」, í��한국인물사연구��10, 한국인물사연구소, 2008, 412-414쪽. 26) 「김시현씨 28일 하오 석방」, 《대구매일신문》 1960년 4월 29일자; 허종, 「1945~1960년 김시현의 통일국가 수립운동과 이승만 대통령 저격사건」, ��한국인물사연구��10, 한국인물사연구소, 2008, 414-418쪽; 김시현은 1960 년 7월에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서 안동 갑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 며, 임시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