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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34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하고 대원군의 복권을 은연 중에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유 생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대원군파를 크게 고무하였다. 그러나 이 러한 척사운동도 고종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것은 척사 운동 뿐만 아니라 대원군 봉환운동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고, 또 이 같은 방법으로는 대원군의 복권이 불가능함을 인 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을 것이다. 대원군파는 이제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재선李載先 사건 또는 안기영安驥泳사건으로 불리어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12) 즉, 안기영 등은 영남만인소의 소유와 연락을 취하면서 유생들의 척사운동이 점차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가자 보다 적극적인 실력에 의한 척왜斥倭(=伐倭)를 위한 거사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8월 21일로 거사날을 잡았으나, 준비의 소홀로 중지되었다가 다 시 거사를 준비하였지만, 고변으로 발각되고 말았다. 역모사건으 로서의 안기영사건은, 고종의 집요한 추적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추상적일 뿐 구체성을 가지지 못하였다. 이것은 고종과 척족세력 에 의해 과장‧확대된 것이거나, 아니면 준비과정에서 대원군 세력 의 조급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 사건은 남인인 한계원韓啓源이 위관委官이 되어 황당무 계한 역모사건으로 주모자를 처벌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으나, 11) 권오영, 앞의 논문 참조. 12) 송병기, 앞의 논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