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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294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료하였다. 대구지역 피난민은 1952년 9월말 12만 4천여 명 중 1만 4천 8백여 명이 40여 개의 수용소에 수용되어 있었다.71) 사회부는 또한 상이군경에 대한 구호사업으로 동래 온천에 ‘중앙상이군인 정양원’을 설치하고 1,000여 명의 상이군인을 수용하였다. 전쟁 발발부터 1년 동안 이러한 군사 원호사업에 사용한 비용은 총 171 억 원 규모였으며, 유엔이 무상 공급한 8만 톤의 식량은 피난민구 호에 사용되었다.72) 정부는 피난학생들을 피난지 소재 각 학교에 등록 수용하게 하 고 수 개의 학교를 연합하여 학교를 설치하는 등 비상조치를 강구 하였다. 1951년 2월 정부는 전시 교육에 관한 특별조치요강을 제정 발표하여 중단된 수업을 재개하도록 각급 교육기관에 시달 하였다. 그 내용의 핵심은 피난학생의 취학독려, 가교, 특설학교 또는 분교 설치, 북한 피난학생의 피난지 수용, 도시 피난학교의 설치 전시연합대학 설치, 벽돌 교사 건축, 원조 임시교사 건축 등 이었다.73) 경상북도 일대에 전화를 입은 곳에서는 학교시설이 크게 파괴 되었고 대구시내에서도 학교시설의 군 점령으로 대구지방 교육 은 심각한 시설부족에 봉착하였다. 전국의 안정에 따라 많은 71) 대구시사편찬위원회, í��대구시사��3, 1995, 565쪽. 72) 국방부, ��한국전란1년지��, 1951, A79-80쪽; 1951년 1월 현재 수용소 피난민 수는 65만 명이었고 이들에게 지출된 구호비는 56억원 정도의 규모였다. 73) 대구시사편찬위원회, ��대구시사��3, 1995, 6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