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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1편 정치 1 장 위정척사운동 [사진8] 고종의 í��척사윤음�� (1881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사실이 큰 힘이 된 것으 로 보인다. 척사운동이 각 도道로 확산되면서 그 내용에 있어서도 조금씩 변화 하고 있었다. 즉,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가 위 정척사론의 입장에서 ��조선책략��을 공박한 것이라면, 3월 하순 이 후부터는 이뿐 아니라 일본과의 강화와 개화자강정책까지도 반 대하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유소에 대해 그 소수疏首들에 게 엄형과 회유를 병행하기도 하였고, 급기야는 5월에 들어서 ��척 사윤음斥邪綸音��을 통해 유생들과 일정한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었 다. 이로써 척사운동은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척사상소는 계속되어, 급기야 충청‧전라‧강원‧경기 4도 유 생들이 복합하기에 이르렀다. 이 중 강원도 유생 홍재학 洪在鶴의 상소 는 국왕이 등극 후 한 번도 위정척사의 정령政令을 편 적이 없음과 국왕 의 척사는 여러 사람의 입을 막고 눈을 가리는 문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여 고종의 전교傳敎와 윤음綸音을 직접적으로 비난하기까 지 하였다.11) 유생들의 이 같은 척사운동은 일찍이 대원군이 단행한 척사정 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것은 고종의 친정을 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