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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32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개되면서 연대투쟁이 모색되기도 하였다. 충청도출신 홍시중洪時中 과 황재현黃載顯이 상소를 올렸으며, 이천의 유생이 복합에 참여하 기를 희망하였고, 기호 소유들은 영남소청을 방문하여 서로 교유 하였으며, 충청도 유생 300여 명이 영남유생과 함께 상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에도 각지 유생들의 상소운동은 계속되었다. 영 남만인소에 촉발된 전국적인 상소운동은 결국 5월 15일 조정으로 하여금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발표하게 만들었다. 영남에서 만인소가 추진되고 있는 동안 조정의 집권세력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협박과 회유를 병행하고 있었다. 즉, 당시 남인으로 영중추부사였던 한계원韓啓源은 영남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도륙내겠다는 말로 협박하기도 하였고, 만인소를 회유하 기 위해 이만유李晩由를 승지로 발탁하기도 하였다. 또한 도소에는 익명서가 나붙거나, 경주의 손우영孫羽永‧손철영孫喆永이 영주군수 손해진 孫海震의 지시로 방소문防疏文을 작성하여 유소를 저지‧비방하 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남의 대표적인 명가들이 일시 참 여를 꺼리기도 하였다. 이 같은 사정에서 안동의 하회는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고, 유곡 과 해저‧천전‧수곡은 억지로 따르고, 순흥은 소사에 뜻이 없고, 예 천은 중론을 따르고, 예안은 점점 해이해져 가며, 영주는 앞서 추 진하는 자 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평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러한 가 운데서도 만인소는 그대로 추진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안동의 김흥락 金興洛이 한계원의 협박에 대해, 영남만인소는 영남 전역이 합의하여 추진한 일이기 때문에 그만둘 수 없다는 뜻을 천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