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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장 6‧25전쟁과  안동 281 1편 정치 내기 위한 검문소 설치 등 보급로 상의 피난민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동 부근의 피난민 상황은 자료 부족으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안동 북부지역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과 안동 읍민 들의 피난상황 등으로 대단히 혼잡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피난 민의 일원으로 남하하여 안동역을 통해 대구로 피난한 강학철의 회고 내용이 참조가 된다.55) 1950년 7월 7일 나는 태백에서 피난하기 위해 부산을 향해 떠 났다. 우리는 밤길로 동점을 지나 밤새 소천까지 왔을 때 많은 피난민 대열에 섞여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침이 밝아 오는 데 그 많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우리 앞에 갈래 길이 나타난 것이다. 그중 하나의 길은 춘양을 지나 봉화와 영 주행이고 다른 하나는 안동 쪽으로 통하는 길이었다. 아침 햇 살이 춘양 쪽 고갯길에 비치면서 일단의 사이드카를 탄 북한 인민군 선발대가 내리막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 북새 통에서 안동 쪽 길을 택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길가의 무 산이라는 한 동네 집에서 아침밥을 시켜 먹었다. 신작로에 나 서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멈추시오. 동무들”하고 외치며 우리 앞에 소련제 장총을 들이대고 나타 난 인민군 복장의 사나이와 레닌모를 쓰고 소련제 권총을 든 키 작고 허름한 블루진 작업복 차림의 정치공작원과 마주쳤 55) 피난민 「강학철의 증언」(2003.2.12). http://youngnak.net/mannam/2003-02/page02-09.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