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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1편 정치 1 장 위정척사운동 안동의 이만손이 중심이 된 만인소 소유들은 1881년 정월 20일 경부터 도회소인 상주의 산양에 모여 제출된 수십 통의 소초疏草를 검토하여 소론인 강진규姜晉奎의 척사소를 채택하였다. 2월 4일에 는 산양 도회소를 출발하여, 17일에는 300여 명이 한강을 건너 남대문 밖에 머물렀다가 다음날 곧바로 복합상소伏閤上疏에 들어 갔다. 이후 점차 성균관 유생들과 뒤이어 도착한 소유들이 참여 함으로써 이들 무리는 400명을 넘었다. 26일에는 마침내 봉소하게 되었으나 만인소의 요구는 고종으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소수와 소유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것은 김홍집과 함 께 민씨척족 그리고 이최응李最應을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으로 구 성되었던 원래의 상소 내용이 당국자와의 타협을 통해 김홍집만 을 비판하는 것으로 수정되었기 때문이었다.10) 그러나 서울에 남아 있던 소유들은 이후에도 상소활동을 계속하 였다. 2차 상소에는 김조영이, 3차 상소에는 김석규가 소수로 추대 되어 활동하다가, 안변부와 덕천으로 유배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1차 만인소의 초본이 유통됨으로써 이만손과 강진규가 의금부에 서 추국을 받고 신지도와 녹도에 각기 유배되었고, 노론의 영수인 김평묵이 영남소청에 편지를 보내 격려하기도 하였다. 이후 4차 상 소가 전개되는 가운데, 영남 이외의 지역에서도 상소운동이 전 10) 이러한 교섭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은 이만유였다. 이만유는 이후 승지에 임명된다(í��渚上日月��신사 1월 13일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