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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28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친정 후, 특히 개항 후 좀 더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 던 이유는 정부 내에 여전히 온존해 있는 척화론자들과 대원군의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7) 사실 개항은 대 원군과 남인의 입장에서도 고종의 친정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좋은 계기였다. 그러나 개항을 전후한 시기 또는 재야 노론의 상소운동 에도 불구하고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유림, 또는 남인들의 움 직임은 별로 없었다. 아마 대원군 봉환만인소大院君奉還萬人疏(1873) 가 막 끝난 상태에서 여기에 적극 대응할만한 여유가 없었거나, 아니면 척사운동을 주도하고 있던 노론이 남인을 내응세력으로 규 정하여 견제하고 있는 입장에서 쉽사리 움직일 수 없었을 지도 모 르겠다. 1876년 고종의 개화정책이 추진되자 안동과 상주의 산양에서도 대규모의 척사론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미 개항이 이루어짐으로써 집단적인 척사운동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대신 류치명의 제자 인 이돈우 李敦禹가 9조소를 통해 척사를 주장하였다.8) 즉, 그는 “옛 날의 척사는 단지 언어와 문자로 했을 뿐이었지만, 지금의 척사는 부득불 군사훈련으로 급선무를 삼아야 한다.”고 하여 적극적으로 6) 김도형, 「개항이후 보수유림의 정치사상적 동향」, í��1894년 농민전쟁연구��3, 역사비평사, 1993, 219-220쪽. 7) 연갑수, 「개항기 권력집단의 정세인식과 정책」, ��1894년 농민전쟁연구��3, 역사비평사, 1993, 105쪽. 8) 이돈우, 「應旨陳三綱九目疏」(1877년), ��肯庵文集��권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