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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장 해방정국과  국가건설운동 223 1편 정치 강화하였다. 같은 해 7월 미소공동위원회는 이전과 같이 두 나라의 입장 차이 로 다시 결렬될 위기에 빠졌다. 미소공동위원회의 활동에 큰 기대 를 걸고 있던 좌파 세력은 공동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7월 27일에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집회가 열렸지만, 안동에서는 미군정이 집회를 금지 하여 열리지 못하였다. 8월 들어 미소공동위원회가 사실상 결렬 되고 좌파 세력의 활동을 우려한 미군정은 경북 도내 좌파 세력 의 정당과 사회단체 간부를 비롯한 수백 명을 체포하였다. 11월 에도 안동에서 25명을 체포하는 등 경북 도내에서 3백여 명의 좌 파 인물을 체포하였다. 좌파 세력은 미군정의 대대적인 검거와 탄압으로 합법적 활동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고 비합법 활 동으로 전환하여 인민공화국의 수립과 미군정의 정책을 반대하 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1월 풍산면에서 좌파 세력은 인민공화국 의 수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풍산‧일직‧남선‧서후면에서 는 농민들이 미군정의 정책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노동자들 도 미군정을 비판하는 내용의 전단을 살포하며 시위를 벌였다. 좌파 세력의 활동은 성과를 거두기보다는 관련자들이 계속 체 포되어 역량의 손실을 초래하였다. 이 무렵 정세는 미국이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한국 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11월 유엔 총회는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결정하고 1948년 1 월에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소련과 북쪽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