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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1편 정치 1 장 위정척사운동 그러나 1871년 47개소를 제외한 모든 원사에 대한 훼철이 조령 朝令으로 확정된 후 영남에서는 각 읍별로 향회를 열거나 서원 상호 간에 통문을 내어 여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상주의 도남서원과 안동의 호계서원 등이 중심이 되어 소회疏會를 열고, 4월 28일에는 마침내 의성향교에서 1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도회를 개최하여 상주의 정민병鄭民秉을 소수疏首로 선 출하고, 63개 읍에 소유疏儒를 배정하였다. 그리고 각읍各邑‧각문各 門 에서 제출한 명첩名帖의 유생은 모두 10,027인이었다. 만인소를 준비하는 동안에 양선洋船의 침입으로 어재연漁在淵 등이 전사하고 영해에서 적변賊變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또 각 고을마 다 포수砲手를 선발하여 방포放砲하는 등 민심이 극도로 소란스러워 소행疏行의 전도가 극히 불투명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 에서도 소수를 비롯한 소유들은 도회소인 문경을 출발하여 중순 경에 서울에 도착하였지만, 대원군의 강력한 제재에 밀려 소수는 형리 ‧나졸 등의 감시 하에 형조의 서리청書吏廳‧형옥刑獄‧경기도 감 영 등을 거쳐 상주로 돌아왔고, 나머지 소유들은 전원 한강 밖으로 축출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상소는 봉입捧入되지도 못한 채 마무리 되었다.5) 강력해 보이던 대원군 정권은 1873년 최익현崔益鉉의 상소를 계 5) 이수환, 「대원군의 원사훼철과 영남유소」, í��교남사학��6, 영남대 국사학회,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