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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1920년대  이후  국외  안동인의  항일투쟁 197 1편 정치 3. 모스크바 극동민족대회와 안동인 만주와 중국관내 지역 이외에서 활동한 안동인의 행적으로는 모스 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했던 김재봉과 김시현의 움직 임이 대표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짓는 베르사유(Versailles) 조약이 체결된 뒤, 후속 작업으로 두 개의 국제회의가 준비되고 있 었다. 하나는 워싱턴회의이고, 다른 하나는 소련에서 준비한 극동 지역 민족대표회의였다. 앞의 것은 태평양 군축회의인데, 이승만은 여기에 한국문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였고, 임시정부도 여기에 매 달렸다. 워싱턴회의는 결국 1921년 11월부터 다음 해 2월 사이에 열 렸지만, 한국문제와는 거리가 먼 회의였다. 반면에 소련에서 워싱턴회의에 맞서기 위해 준비하던 국제회의 는 한국문제를 중점 사항으로 다루는 것이었다. 이에 코민테른은 동방으로 혁명을 확산시킬 수 있는 모임을 준비했다. 같은 시기인 1921년 11월 11일에 이르쿠츠크에서 ‘약소민족은 단결하라’는 표 제를 내걸고 극동 여러 나라의 공산당과 민족혁명단체 대표자의 연석회의를 소집한다는 계획이 그 골자였다. 코민테른은 한국문제 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움직임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그대로 전달되었고, 그들의 시선이 모스크바로 집중되는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이념 차이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수 용 여부와는 관계없이 많은 인사들이 소련으로 가기를 희망했다. 나라 안팎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대표 56명이 여기에 참석했 고, 그 가운데 안동 오미마을 출신 김재봉과 근처 현애마을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