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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1920년대  이후  국외  안동인의  항일투쟁 195 1편 정치 로 의열단에서 세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다. 1기생으로 입교한 그는 1932년 10월부터 6개월 동안 훈련을 받고 초급군사 간부로 양성되었다. 1933년 그는 국내 거점을 확보한다는 임무를 띠고 귀국했다가 다시 검거되었다. 육사의 빛나는 저항정신은 1943년에 다시 나타났다. 문단의 대 표적인 인물들이 대다수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던 1943년, 그는 오히려 또다시 독립운동의 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4월에 북 경으로 가서 새로운 투쟁을 계획하였다. 3개월 지난 1943년 7월에 그는 모친과 맏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향 마 을을 다녀간 그는 서울에서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되어 북경으로 압송되고, 그곳에서 1944년 1월 16일에 순국하였다. 그 의 시신은 친척이자 동지로 활약하던 이병희李丙禧(女)에게 인도되 었다. 중국관내에서 안동인들이 펼친 독립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 이 한국광복군 활동이다. 임시정부가 중일전쟁 이후 군대를 조직 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결실이 바로 1940년 9월 17일 중경 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이었다. 광복군은 초기에 중경에 위치한 총사령부 외에 서안의 제1지대(군사특파단)와 수원성 포두包頭의 제2지대, 안휘성 부양 阜陽의 제3지대, 그리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의 5지대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민족 역량의 총집결에 따 라 1942년 7월 김원봉이 지도하는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편제가 확대 개편되었다. 즉 조선의용대는 1 지대로, 기존의 1‧2‧5지대를 합쳐 2지대로 각각 편성하였고, 19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