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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194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김시현은 김규식으로부터 군사간부학교 소식을 듣고 함께 남경 으로 김원봉을 방문했다. 그 자리에서 김시현은 북경지역에서 청 년 자원을 확보할 초모관招募官 직책을 맡았다. 또 김시현은 의열단 의 주요 간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군사간부학교 1기생이 졸업한 직후, 그는 의열단 지도부 대표 자격으로 1933년 6월 말 남경에서 열린 의열단 전체회의에 참석하고, 김원봉을 비롯한 7명의 중앙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김시현은 또 1933년 북경에서 군사간부학교 1기 졸업생인 한삭 평韓朔平(일명 朴俊彬)이 변절하여 밀정 노릇을 한다는 사실을 알 고 그를 처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다시 구속된 그는 1935년 2월 15일 살인미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언도 받고, 나 가사키 형무소에서 1939년 9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리고서 그는 이듬해 1월 서울로 돌아왔다가, 4월 북경으로 가서 불굴의 항일투 쟁을 계속했다. 이육사는 1925∼1926년 무렵 북경에서 중국대학을 다녔다. 그 러다가 1927년 8월 귀국하여, 10월 장진홍의거에 연루되어 1929년 5월까지 옥고를 치렀다. 이때부터 ‘이활’이란 이름과 ‘대구264’라 는 필명을 동시에 사용했고, 뒤이어 고기 먹고 설사한다는 뜻을 담은 육사肉瀉, 식민지 역사를 죽여 없앤다는 뜻으로 육사戮史를 사 용하다가, 공개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적절한 용어를 찾은 것이 육 사陸史였다. 광주학생운동 1주년을 맞아 대구에 격문을 뿌린 혐의로 구금된 육사는 풀려나자마자 다시 중국으로 갔다. 이때 들어간 곳이 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