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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1920년대  이후  국외  안동인의  항일투쟁 193 1편 정치 광주학생운동에 관련된 학생들이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만주 로 탈출해 오자, 1930년 말에 의성숙義誠塾(봉천중학)을 세워 학생 들을 받아들이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는데, 1931년에 그가 체포 될 때까지 400여 명이 의성숙을 거쳐 나갔다. 그는 1931년 10월에 체포되어 5년형을 선고받았고, 1938년에 출옥했다. 그는 다시 2차 망명길에 올랐다. 만주와 북경 및 연안 등지를 돌 며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방향을 모색하던 류림은 1942년에 중경 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당시 임시정부 주변은 민족주 의 좌파 계열인 김원봉이 이끄는 민족혁명당이 있었고, 공산주의 세력인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아나키즘 계열인 조선혁명자연 맹 등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1942년 10월에 조선무정부 주의자연맹 소속으로 임시의정원의 경상도 의원이 되어 활동했 다. 그리고 1944년 제38차 임시정부 정기회의에서 조선무정부주 의자연맹을 대표하여 국무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해방이 되자, 임 시정부 제2진으로 1945년 12월에 귀국했다. 김시현이 대구형무소에서 출옥한 때는 1929년 1월 29일이었다. 그는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서 1932년 의열단 간부로 다 시 등장했다. 의열단이 남경에 설립한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라는 이름의 군관학교 운영에 그의 존재가 드러났던 것이다. 의열 단은 1932년 10월 남경 근처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열 었다. 모두 3기에 걸쳐 125명이 졸업하는데, 여기에 1기생으로 입 교한 26명 가운데 한 사람이 이육사이고, 북경지역에서 생도 모집 의 책임을 맡은 인물이 바로 김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