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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1920년대  이후  국외  안동인의  항일투쟁 191 1편 정치 출되고, 군사분과위원을 맡아 위상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안창호 와 윤해가 부의장을 맡은 사실을 헤아린다면, 김동삼의 위상을 확 연하게 판단할 수 있다.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운 정부조직체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를 적절하게 개조하자는 개조파로 나뉠 때, 김형식은 김동삼과 마찬가지로 후자에 가담하였다. 비록 김동삼이 개조파에 가담했다고는 하지만, 그는 대개 전체를 하나 로 아우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 특성은 이후 만주지역에서 펼쳐 나간 그의 활동에서도 지속되어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통일에 최선을 기울이는 특성을 보여주었다. 한편 풍천면 구담출신인 류 시언은 교육분과위원과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개조파와 창조파 양자에 가담하지 않고 중도론을 표방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해산되자, 임시정부 는 심각한 난관에 부딪쳤다. 이를 해결하려면 임시대통령 이승만 을 탄핵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인물들이 앞장서서, 결국 그 를 면직시키고 후임으로 박은식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은 제도 변혁을 일구어내면서 곧 사망하였다. 이에 따른 변혁이 바 로 대통령중심제를 내각책임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 상’에 해당하는 ‘국무령’을 두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안동출신으로서 만주지역 독립운동계의 정신적 지 주인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계 전체 가 겪고 있던 어려운 사정 때문에 그의 국무령 임기는 1925년 말 부터 1926년 초까지 반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비록 그의 임기 가 짧은 시기였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