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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 1920년대  이후  국외  안동인의  항일투쟁 189 1편 정치 김시현은 1919년 5월 잠시 상해를 다녀간 뒤 서로군정서에 참가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귀국했다가 옥고를 치른 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한 뒤, 그 해 5월 다시 상해에 도착했다. 그는 의열투쟁 방법을 선택했다. 즉 폭탄제조와 확보, 국내 수송과 주요기관 폭파 및 일제 인물 처단을 당면 목표 로 삼고, 장건상‧김원봉 등 의열단 지도자들과 상해에서 폭탄확보 에 나선 것이다. 마침 의열단은 1922년에 대규모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1920 년부터 추진하던 적 기관 파괴와 일제 주요인물 처단을 대규모로 펼친다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거기에 들어갈 폭탄과 권총 등 무기 를 국내로 옮기는 작업이 무엇보다 긴요했다. 김시현이 그 일을 맡 고 나섰다. 1923년 2월초에 김시현은 미리 안동현을 답사하고 폭탄 중계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천진 프랑스조계 중국여관에서 김시현 은 김원봉을 만나 무기를 인계받았다. 대형 폭탄 6개, 소형 폭탄 30개, 시한폭탄용 시계 6개, 뇌관 6개, 권총과 탄알 수백 발, <조선 혁명선언>과 <조선관공리에게 고함> 등 전단 수백 장이 인수품의 내 역이다. 이만큼이나 되는 무기는 독립운동가들이 국내로 들여온 가장 많은 기록이다. 하지만 무기를 서울에 옮긴 다음 날 일경에 발각되는 바람에 ‘5월 거사’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김 시현은 1929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김지섭은 1920년에 상해로 망명하고 의열단에 가입하면서 의 열투쟁에 몸 담았다. 그는 김시현과 함께 1922년 서울로 잠입하 여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나섰고, 김시현이 앞장서서 국내로 대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