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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장 1920년대  이후의  사회운동 177 1편 정치 중국에서 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이대용李大用은 학생 활동의 방향 정립에 기여하였다. 안동교회의 김광현金光顯 목사, 백성의원의 백 태성白泰星 원장, 안동농림학교의 교사 류시승柳時昇도 조선회복연 구단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56) 한편 안동농림학교에 다니다가 1942년에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해 일본으로 유학 갔던 이정선李貞善은 일본에서 독립운동가를 만나 비밀결사를 결성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하 였다. 그는 일본에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김원봉金元鳳이 파견한 공작원 이회술을 만나 공작에 필요한 무선통신과 선전선동의 방 법 등을 교육받았다. 그 후 그로부터 일제가 곧 패망하므로 귀국 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이 정선은 학교에 다니면서 친분이 있었던 김한용金漢龍‧권오봉權五鳳 등을 만나 비밀결사를 도모한 끝에 민족의식의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명성회’를 조직하였다. 명성회가 활동하는 과정에서 조선회 복연구단의 존재를 파악하고 교류하였다.57) 2) 조선회복연구단과 명성회의 활동 조선회복연구단은 안동농림학교의 무기고에 있는 총을 탈취하 56) 김희곤, í��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497쪽. 57) 신승훈, 「해방직전(1943~45)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연구」, ��안동 사학��12, 안동사학회, 2007, 171-1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