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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편 정치 1 장 위정척사운동 척사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에서도 영남 유림의 척사운동은 개항의 전후 시기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개진되지 않았다. 영남의 척사론에 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은 일찍이 김도 화金道和와의 문답에서 서학에 대한 위기의식보다는 오히려 노자와 불교를 이단으로 보고, 이에 대한 비판을 우선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에 앞서 안정복安鼎福‧남한조南漢朝‧류건휴柳健休 등의 척사에 대한 논의와 학설이 있었고, 류치명은 이들 문하를 출입하거나 학문적 토론을 통해 이들의 견해를 수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영 남의 일반적인 정서는 퇴계의 정통 성리학이 강하게 뿌리내려 있기 때문에 서학이 침투할 여지가 없다는 인식이 강하게 작용함으로써 척사론에 대한 인식을 깊이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1)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유림들은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 때까지도 서양에 대한 절박한 위기의식을 가 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척사운동을 두드러지게 전개하지 않았다. 도리어 대원군의 서원훼철에 더 큰 관심과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 었다. 서원의 유지와 수호야말로 정학을 지키는 ‘위정衛正’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외세가 침략하는 상황에서 서원을 훼철한다 1) 척사론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는 다음의 글들을 참고하였다. 권오영, 「1881년의 영남만인소」, í��윤병석교수화갑기념 한국근대사논총��, 지식 산업사, 1990; 송병기, 「신사척사운동연구」, ��사학연구��37, 한국사학회,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