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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1910년대  독립운동 123 1편 정치 리된다. 첫째, 시위 주도세력의 사회적 성격은 유림과 기독교인이 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농민들이 주력부대로 틀을 갖추면서 밀고 나갔다. 둘째, 시위를 주도한 유림들의 경제력은 넉넉하지 못하거 나, 가난한 정도에 머물렀다. 그들 대다수가 자작농이거나 자‧소 작농이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으로 천대를 받아온 상인이나 공장인이 많았고, 또한 상업적인 농업을 경영하 는 경우가 많았다. 4. 파리장서 ‘파리장서’는 3‧1독립운동 직후에 일부 유림세력이 파리강화회 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는 긴 청원서[長書]를 보낸 일이다. 이후 1925‧6년에 유림들에 의해 의열투쟁이 있었는데, 이것을 ‘경 북유림단의거慶北儒林團義擧’ 혹은 ‘제2차 유림단의거’라고 부르면서, 파 리장서 보낸 일을 ‘제1차 유림단의거’라 부르기도 한다. 서울에 머물던 신진유림들은 2월에 들어 고종의 장례문제와 파 리강화회의에 대응하여 독립의사를 국제사회에 밝히는 일을 추 진하였다. 독립청원서를 강화회의에 보내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 거사는 서울에서 김창숙金昌淑‧김정호金丁鎬‧이중업李中業‧류 준근柳濬根‧류진태兪鎭泰‧윤중수尹中洙 등의 논의로 시작되었다.48) 이 어서 김창숙이 그의 스승 곽종석郭鍾錫을 만나면서 급진전되었다. 그 과정에서 충남지역에서도 같은 일이 추진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