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page

Ⅰ정치‧행정Ⅰ 122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독립운동의 절정이었다. 안동시위의 계기는 동경 유학생의 소식 전달과 광무황제 고종 의 장례에 참가했던 유림이나 학생에 의해 마련되었다. 특히 장 례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서울시위 현장에서 갖고 온 독립선언서나 태극기가 안동시위 현장에 그대로 사용되고, 전해진 독립선언서 는 예안‧안동‧임동‧임하‧길안 등 5곳에 전달되었다. 시위 현장에 등장한 격문으로는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 (안동‧임동‧길안)과 등사한 문서(안동) 정도이며, 태극기는 거의 전 시위 지역에서 대부분 사용되었다. 그러나 안동면 시위에서 ‘왜적은 퇴거하라 침략간흉계侵略奸凶計를 버리라’라는 격문이 등장하여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인다. 시위 날짜는 장날이었다. 안동지역의 14회 시위 가운데 8회(예 안2,안동3,임동1,길안1,풍산1)가 장날에 일어났으며, 그 날에 는 장이 서지 않는 인근지역 주민까지 모두 시위에 참여하였다. 17‧22일의 예안면 시위에서는 인근 도산‧동후‧녹전면 등지의 군 중이 참여하였으며, 21일의 임동면 시위에서도 임북면 주민들과 멀리 청송군 진보면민들도 참여하였다. 특히 23일의 안동면 시 위에서는 군 전체가 참여한 모습을 보였다. 시위 장소는 장터가 중심이었다. 이것은 전국적으로 어느 지역 이든지 마찬가지였다. 안동은 인명피해가 경북에서 가장 많은 곳 이었다. 시위 주도세력의 수형기간을 보면, 168명의 실형 선고자 중에서 2년형이 가장 많고 3년 이상도 14명이나 된다. 안동 3‧1독립운동을 열어나간 주도세력의 성격은 두 가지로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