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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120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격 12회, 일반관서 공격 6회 중에서 안동이 각각 3회와 5회를 점 했다. 이는 안동시위의 격렬성을 보여준다.46) 안동시위 당시 인명피해에 대한 일제 기록은 실제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안동지역에 남은 기록에는 23일의 안동군 전체가 참 가한 안동면 시위에서 30여 명의 피살자가 발생하였으며, 당시 안 동면 시위를 이끌었던 송기식은 죽음을 당한 자가 40여 인이라 기 록했다. 이 수치는 3‧1독립운동 이후 취조과정에서 고문 등 후유증 에 의한 안동지역 전체의 사망자를 합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안 동면 시위에서 이름이 밝혀진 피살자는 14명에 불과하다. 일본경찰은 23일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 였다. 이 때문에 피해가 컸다.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비인간적으 로 잔혹했는가는 예안시위에 참가한 후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두 눈을 잃은 한 여인의 사례로 확인된다. 다음은 일제경찰이 기록 한 내용이다. 안동의 양반 고 이중업의 처는 1919년(대정 18) 소요 당시 수비 대에 끌려가 취조받은 결과 실명失明했고, 이후 11년 동안 고생한 끝에 1929년(소화 4) 2월에 사망했기 때문에, 밤낮 적개심을 잊을 수 없다는 뜻을 아들 이동흠이 스스로 고백하 고 있다.47) 46)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í��고등경찰요사��, 1934, 23쪽. 47)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