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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1910년대  독립운동 117 1편 정치 비되기 시작했다. 임찬일은 금양의숙錦陽義塾에서 수학한 후 고종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하여 봉도단에 가입하였다. 그는 귀 향 후 즉시 안동의 김원진과 밀의하고 선언서를 준 후 동지규합 에 나섰다. 21일 저녁, 백여 명의 금소 동민들은 마을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면소재지인 신덕으로 몰려갔다. 신덕주재소에 몰려간 군중들은 일경의 위협 발포로 한때 해산했으나, 밤 9시경 다시 3백여 명의 군중들이 주재소에 밀고 들어가서 일부는 몽둥이를 들 고 돌을 던지기도 하였다. 주재소를 파괴한 후 임찬일과 노말수가 앞장서서 임하면사무소를 공격하여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모두 부 숴버렸다. 여기에 앞장선 사람은 임찬일‧노말수‧조복선趙福先‧임석 현林錫鉉‧박유석朴有石(본명은 ‘임유진’이라 전해진다) 등이었다.40) 임하시위에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지만 사상자가 없었다. 그러 나 안동수비대의 추격을 받던 임호일林浩逸‧임지열林志烈‧김도주金道周 ‧신달석辛達石‧신필원辛必元 등 5명이 26일에 살해당했다.41) 임하시 위로 실형을 받은 사람은 15명이다. 4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í��독립운동사자료집��5, 1983, 1356-1357쪽. 41) 임호일 등 5명은 임하면 임하리 밭 750번지와 금소초등학교(현재 폐 교) 근처에서 피살되었다(김을동, ��안동판독립사��, 명문사, 1985, 215- 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