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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1910년대  독립운동 115 1편 정치 거리와 사월에서 일어난 시위로 재판에 회부된 자는 모두 69명 (67명: 실형, 2명: 무죄)이었다. 이 숫자는 경북지역 면 단위 시 위에서 가장 많은 기소자를 기록한 것이며, 격렬한 모습을 증명 한다. 4) 길안‧임하면 시위 임동시위가 일어난 3월 21일, 길안 천지에서도 오후 3시경에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임하면 오대동의 손영학孫永學‧김정 익金正翼‧김정연金正演 등은 가까운 길안면 천지장터에서 시위하기 로 결의하였다.35) 이 때 오대동 인물로 서울에서 광무황제 인산 에 참가한 정성흠鄭成欽이 있었다. 이들은 깃발을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장터를 돌다 가 면장과 면서기에 참여를 촉구하려고 면사무소로 향했다.36) 350여 군중들은 오후 6시 경 면사무소에 투석하여 유리창과 출입 문을 부수고, 다시 300여 미터 떨어진 천지주재소로 몰려갔다. 순 사들이 공포를 쏘기 시작하자, 시위 군중들은 흩어졌다.37) 이 때 34)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í��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신흥인쇄소, 1991, 147쪽. 35) 《대구매일신문》 1982년 5월 1일자. 3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83, 1364쪽. 37)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