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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114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직)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임동시위는 류동시柳東蓍가 국 장에 참가했다가 돌아오면서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정재 류치명 의 주손인 그는 협동학교를 운영하던 류동태柳東泰‧이균호李均鎬와 의논하고 숙부 류연성柳淵成과도 협의하였다. 또 협동학교에서 태 극기와 독립선언서도 준비하였다. 3월 21일 오후 1시쯤 지나서 기독교인 1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 르자 시장에 모인 군중들이 같이 따라 불렀다. 여기에서 류연성이 시위대를 이끌었다. 이 때 우치다[內田] 순사가 이를 가로막다가 밀려서 주재소로 도주하자, 군중들은 주재소로 향했다. 주재소를 밀고 들어간 군중들은 일본경찰이 휴대하거나 보관하던 무기를 모 두 빼앗았다. 시위대는 일본경찰을 완전히 제압하고, 주재소를 부수고 무기를 모두 우물에 집어넣어 폐기했다. 시위 군중들은 22 일 새벽 2시경 모두 해산하였다. 군중이 흩어진 이후 새벽 5시 무 렵 안동에서 수비대가 도착했지만, 현장에서는 아무도 없어 붙들 린 사람은 없었다. 이 때 시위 참가인원은 약 500명이고, 성원을 보낸 자는 1,000명 이상이나 되었다.33) 임동시위대의 일부가 3월 22일 오후 2시쯤 이웃에 있는 임북면 소재지인 사월(현, 임동 사월)로 몰려갔다. 그리고 그 지방 사람들 과 합세한 3백여 명이 면사무소와 숙직실을 부수고, 서류도 파기 한 뒤 오후 5시쯤 자진 해산했다.34) 21일에서 22일까지 임동 챗 33)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í��고등경찰요사��, 1934, 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