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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1910년대  독립운동 113 1편 정치 7시부터 약 2,000명의 군중들이 태극기를 들고 동부동과 서부동, 선성산 위에서 서로 무리를 이루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때 밀집한 시장에서 군중 해산에 힘쓰던 일본경찰 2명이 시위군중에 포위되자, 수비병 6명이 총을 쏘아서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 때 시위 군중 13명이 부상을 입고 3명이 체포되었다.30) 예안시위로 재판을 받은 자는 모두 50명이다.31) 예안면 1차 시위는 안동면 만이 아니라 이웃 도산면 시위에도 직 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8일 이용호‧이극호가 주동이 되어 마을 앞 개울가에 있는 큰 나무 밑에서 동민과 같이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호기도 도산공립보통학교 교정에서 30여 명 학생과 독립만세를 외쳤다.32) 도산 만세시위는 예안시위의 열기를 계속 확산시켜 나 가는 의미를 가졌다. 동후면 시위는 예안 2차 시위 다음날인 3월 23일 오후 2시에 절강동(현 ‘와룡 절강동’)에서 일어났다. 백여 명 의 군중이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창문‧비품‧서류 등을 모두 파괴 하고 스스로 해산하였다. 3) 임동‧임북면 시위 안동의 3‧1독립운동은 21일이 되자 4개면(임동‧임하‧길안‧일 30)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í��고등경찰요사��, 1934, 27쪽. 3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83, 1359쪽. 3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83, 13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