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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112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람인 조수인趙修仁도 의거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셋째, 예안 만촌 교회(현 예안교회)에서도 교인들을 중심으로 3월 17일의 만세 시 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예안시위는 3월 17일 오후 3시 30분 경 2‧30명의 군중이 면사무 소 뒤편 선성산宣城山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되었 다. 시장주변의 세 곳에 있던 약 30명 정도씩 3개 시위대가 일제히 시장을 향하여 진격해 갔다. 일본경찰이 수비대까지 동원하여 시위 군중 진압에 나섰지만, 이동봉은 만세를 부르며 앞장서서 군중을 예안주재소로 이끌어 갔다. 이를 본 이열호李列鎬와 예안 선명학교 및 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던져주어 시위 군중들에게 용 기를 북돋우었다.26) 주동자를 비롯한 15명이 체포당했다.27) 오후 6시경, 격분한 군중들이 점차 주재소로 몰려와서 구금자 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군중의 수가 늘어나 1,500명을 넘었으며, 붙잡힌 사람을 찾아내려고 돌과 기왓장을 던지면서 주재소로 밀 고 들어갔다. 이때 25명이 다시 붙잡혔다.28) 해산 군중 가운데 와룡‧예안면민 약 600명은 산을 타고 안동 북문으로 들어가 다음 날 18일 안동시위에 합세하였다.29) 3월 22일, 다시 예안 2차 시위가 일어났다. 해질 무렵인 오후 26) 류한상‧김해길, í��안동지 - 안동지방의 항일운동��, 고향문화사, 1987, 59-60쪽. 27)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7쪽. 28)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27쪽. 2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3‧1독립운동사(하), 1983, 3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