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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1910년대  독립운동 111 1편 정치 을 입었다. 군중들은 북서쪽 산 위로 철수하여 만세를 외치고 해 산하였으니 그때가 다음날 새벽 4시경이었다. 일본경찰과 수비대 및 자위단의 공격과 탄압이 극에 달했다. 안 동면 시위에서 현재까지 밝혀진 피살자는 김옥진金玉鎭(안동면)‧권 두경 權斗慶(서후)‧이암회李岩回(서후)‧권도익權道益(와룡)‧황영남黃英南 (남후)‧김필수金필洙(와룡)‧김회백金會伯(와룡) 등인데, 아쉽게도 나 머지 희생자의 이름을 다 알 수 없다.25) 2) 예안‧도산‧동후면 시위 안동지방에서 대규모 군중이 참가한 첫 만세운동은 예안에서 일어났다. 예안시위의 발단은 광무황제 인산에 참가했던 이동봉 李東鳳‧이용호李用鎬‧김동택金東澤‧신응한申應漢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들은 서울의 시위를 직접 보고 돌아와 소식을 전하면서 시위를 준비하였다. 예안시위는 계획단계에서 세 갈래로 준비되었다. 첫째, 예안면 장 신상면申相冕을 중심한 인사들이 3월 11일 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시위를 논의하였다. 예안시위는 식민통치 기관인 면사무소에서 밀의되었음이 주목된다. 둘째, 예안의 유림 지도자 가운데 한 사 25) 3월 23일 안동 3차 시위에서의 피살자 숫자는 자료마다 다르다. 사망 13명, 부상 20명(í��고등경찰요사��, 28쪽), 사망 38명(김을동, ��안동판독립사��, 명 문사, 1985, 72쪽), 사망 40여 명(��海窓文集��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