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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110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드는 또다른 시위대가 합세하였다. 송기식을 비롯한 류동붕柳東鵬‧ 송장식宋章植‧송홍식宋弘植‧권중호權中鎬‧문소원文召源‧이종록李鍾綠 등 유림이 이를 지휘하였다. 송기식은 안동시위 계획단계에서 이미 안동교회의 김병우‧김원진과 시위를 논의했고, 협동학교‧보문의 숙 寶文義塾‧동화학교東華學校의 교사와 학생을 동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격문을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여기에서 14명이 체포되었고, 시위 군중은 일단 해산했다. 그러다가 오후 6시경 다시 기독교인 60여 명 이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밤이 되자 시위 군중들은 더욱 운집하여 19일 0시 50분경 2,500 여명으로 증가했다. 당시 안동면의 인구가 5,502명이었으므로 대다수의 면민들이 모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일제 통치 기관인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안동지청 등에 몰려들어 구속 자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하고 일부는 불을 지르고자 했다. 이에 일본 수비대의 사격으로 해산되었다.24) 안동교회와 송기식 계열 에 의해 주도된 2차 의거와는 달리, 23일(음 2.22)의 3차 의거는 안동군의 다른 면민들이 대거 참가하여 군 전체가 벌이는 시위 양 상을 보였다. 오후 7시 30분 무렵 시위가 시작되었다. 3천 명 넘는 군중이 “경찰서와 법원안동지원을 파괴하고 구금된 자를 구출하 자”는 구호를 외치며 두 기관으로 밀고 들어갔다. 수비대가 공포를 쏘다가 실탄을 사격하는 바람에, 3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 24) 조선총독부 경북경찰부, í��고등경찰요사��, 1934, 220‧2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