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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정치‧행정Ⅰ 108 안동 근현대사2 -정치‧행정- 李重熙가 3월 13일 장날(음 2. 12)에 거사를 일으키자고 논의하였다.19) 또 안동교회의 김병우金炳宇는 아들 김재명이 서울에서 가져온 독 립선언서를 보고 바로 시위 준비에 나섰다. 김원진은 3월 11일 안동수비대 청사의 인부들을 설득하여,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합세할 것을 합의했다. 그리고 안동군 북후면 옹천 강대극 집에서 만든 태극기와 격문을 몰래 돌리기도 하였다. 그러 나 불행하게도 안동의 3‧1독립운동은 강대극‧김원진‧김영옥‧이중 희 등 주역 4인이 하루 전날인 3월 12일 계획단계에서 예비 검속을 당함으로써 좌절되었다.20) 하지만 안동면의 1차 시위는 완전하게 실패하지는 않았다. 그 것은 이상룡의 동생인 이상동李相東의 활동 때문이다. 그는 태극기 를 모방한 종이 연에 ‘대한독립만세’라 쓰고, 이것을 13일 장날 오 후 5시 반경, 공신상회(현 신한은행 앞 성결교회 입구쯤으로 추정) 앞 도로에서 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21) 그의 단독 시위는 안동의 3‧1독립운동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유림 및 기 독교 지도자들에게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안동면 22)의거는 계획단계에서 안동교회와 송천동의 송기식宋基 19) 안동의 장날은 2‧7일인데, 해방 이전에는 음력으로 장이 섰다. 20) 대한예수교장로회 안동교회, í��안동교회80년사��, 1989, 161쪽. 2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 1983, 1373쪽. 22) 안동시내 행정명칭은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안동면, 1931년에 안동읍 이 되고, 1963년에는 시외 지역을 안동군으로 독립시키고, 시내만 안동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