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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0월31일 수요일 6 (제142호) 관향조 종친회 1455년 세조의 왕위 찬탈 시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 외 8賢의 불사이군(不 事二君) 충절을 기리는 제향이 지난 12 일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호국로 7003-2 3 (사곡리)에서 지역주민과 유림, 후손 등 60여명이 참례한 가운데 철원지역 유 림주관으로 엄숙 봉행되었다.이날 제례 는 임병순 집례관의 집전(執典)으로 장 갑삼(張甲三), 박태봉(朴泰奉), 조오현 (曺五鉉)순으로 헌작하고 장원집(裝元 執) 축관의 독축으로 40여분에 걸쳐 진 행되었다. 구은사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 과 조상치, 그리고 영해 박씨 칠의사(七 義士)인 사복시정 박도, 예조좌랑 박제, 예빈시경 박규손, 형조참판 박효손, 사 직 박천손, 병조정랑 박인손, 병조판서 박계손 등이 단종 폐위에 한탄 사직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며 은거(隱居)한 구은(九隱)을 높은 절의 를 기리기 위해 절의를 숭상하기 위해 1 818년(순조18)에 영해박씨 후손들과 관 내사림의발의로건립되었다. 불사이군의 마음으로 초막동에 내려 와 은거하며 단종의 복위를 도모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지 3백50여 년만이다. 그러나 1864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페 령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고종3년(1894 년 ) 에 이 터 에 설 단 (設 壇 )하 여 구 현 (九 賢)을 다시 배향하고, 1921년 중건되었 으나 한국전쟁의 와중 에 사우가 완전 소실되 어 제향이 중지되다가 1 960년 예빈시경 박규손 의 15대손 박재민의 발 의로 초막동에서 김화 군수의 초헌으로 노천 봉행(露天奉行)되었다. 이후 1971년 가 사우 (假 祠宇)를 부설하고 제 례 를 이 어 오 다 1 9 7 7 년 영해 박씨 후손과 사림제현(士林諸 賢)의 찬조로 신 사우(新 祠宇)를 중건 하 고 9 월 의 상 정 일 (上 丁 日 )에 준 공 및 추계제향(秋季祭享)을 올렸으며, 지난 해 사우 기단을 철거하 고 재설치 및 내 외부 방충공사, 내삼문 신축, 석축, 담장 및 포장공사 등 정비 공사를 통해 새롭 게선보였다. 강원도 철원 구은사(九隱 祀 ) 제향 봉행 세조의왕위찬탈시생육신의한사람인김시습외8賢 구은사제향광경. 영해박씨 노정 감사(왼쪽에서 세 번째)를 비롯한 임원진이 선조 칠 의사를비롯한 선현들의높은충절을기리기위해구은사제례에참 례후기념촬영을하였다. 밀양박씨 참판공 후(后) 요산공문중(회장 재균)은 지난 9 일 경북 경산시 진량읍 소삼장 식당에서 임원회의를 갖고 선 조 묘역 순산 및 원모정 보수 등을 논의 한 가운데 재균 회장 은 선조의 묘역을 순산하는 것은 후손으로서의 도리이고, 재 실을 수호하는 일은 후손들의 숭조심 함양과 일가의 동기를 부여하는일이라며적극적인동참을강조했다.선조묘역순산 은 다음날인 11일 입향조 요산공을 비롯한 아드님 송재공(휘 근손)의 묘역과 요산공의 조부 경근당(휘 근손),아버지 성균 생 원 ( 휘 빈 ) 공 의 단 소 등 을 돌 아 보 고 봉 분 의 형 태 와 묘 소 주 변을꼼꼼히살펴보았다. 그리고1930년지어진원모정은도배를새롭게하고주변환 경 정비 등 보수를 하여 종중원은 물론 지역주민들에게도 쾌 적한경관으로태어나도록하였다. 원모정은 마곡지(저수지)의 수려한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그리고 경산 입향조 요산공이 호 서(湖西) 청주에서 거처를 옮긴 대원리의 숲과 구렁 등 교외 (校外)의 경치에 반하여 조용히 서책을 마주 대하며 ‘아침에 도를 깨달으며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옛 성인이 하는 말을 되 새기며 성리학을 탐구하였던 그 때를 초월하여 대면하는 듯 하다. 요산공은 시조왕의 53세손으로 성종 22년(1491) 휘 빈(彬) 의 아들로 태어났다. 휘(諱)는 운달(雲達) 요산(樂山)은 호 (號)이다. 허백당 홍귀달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여 26세 되 던 중종 11년(1516)무과에 급제하고 31세에 선전관이 되었으 며, 서포서 별검을 거쳐 중종 25년(1530년) 40세에 봉상시 주 부를 지냈다. 50세 무렵 청주에서 경산 진량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은둔하며 발분 면학하였으며, 이웃 고을인 청도의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과 교유하며 시작과 도학의 담론을 나 누고 명종 13년(1558년)68세로 별세하였다. 봉상시(奉常寺)는 조선시대 국가의 제사 및 시호를 의론하 여 정하는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로 주부는 육 품에해당하는관직이다. /박방무명예기자(경북경산시지부) 요산공문중선조묘역순산(巡山)가져 요산공문중은지난 10일순산(巡山)과정에서원모정을찾았다. 입향조요산공묘역에서순산에함께한 종원들이 한자리에모였다. 사진 왼쪽부터병모,체정,재균,명정,창균,진호일가순(順) 원모정보수등논의 내 고장은 전남(全南) 장성(長城)이 다. 내 고장의 큰 줄기인 노령산맥은 전북 (全北)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와서 전남과 전북을 경계 짓는 산줄기로 이어 져 있다. 이 산줄기는 장성을 아늑하게 감싸주고 있다.노령산맥을 뚫고 나온 갈 재골은 호남의 관문(關門)으로서 그 길 이가매우길다. 노령산맥의 한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 큰 학 이 앉 아 있 는 듯 한 모 양 을 하 고 있 어서 학봉(鶴峯)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있고, 그 학봉 아래 복판에는 백양사(白 羊寺)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8대절경(八大絶景)중에하나이다. 이 절에는 국보로 지정된 보물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에는 피서지로서도 좋고 또 가을이 되면 불타 는 듯한 단풍이 곱게 산을 물들여 수많은 관광객들이찾는곳이기도하다. 이 절에는 국보로 지정된 보물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에는 피서지로서도 좋고 또 가을이 되면 불타 는 듯한 단풍이 곱게 산을 물들여수많은 관광객들이찾는곳이기도하다. 이곳 산골짜기의 물은 시냇물이 되고, 이 시 냇 물 이 합 쳐 나 의 고 장 인 장 성 한 복 판을 흐르는 장강(長江)으로 흘러들어 간다. 이 강이 바로 호남평야의 젖줄인 영산강의 발원지인 황룡강(黃龍江)이 다. 강 유역의 땅이 기름져 호남평야는 다시없는곡창지대를이룬다. 내 고 장 자 랑 에 서 또 하 나 빼 놓 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명승천으로 알 려진 영천수(鈴泉水)이다. 이 영천수는 장성읍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 다.영천수는 글자 그대로 일명 방울샘이 라고도 불린다. 국가에 큰 재난이 있을 때마다 맑은 물이 갑자기 변화를 일으켜 나라의 재난을 미리 알렸다는 전설이 얽 혀 있는 명승천(名勝泉)이다. 여름철 삼 복더위를 피해 이곳으 로 찾아드는 피서 객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이 방울샘을 따 라 서 마 을 이 름 도 영 천 동 (鈴 泉 洞 )이 라고 한다. 이 마을이 전 전라남도 도지 사김재식씨가태어난곳이다. 장성의 지세(地勢)는 그야말로 긴 성 으로 감싼 것처럼 고개를 넘어 들어와야 하기 때문에 생전락(生前樂)은 정성(長 城)이요, 사후영(死後靈)은 순창(淳昌) 이 라 고 하 여 살 아 있 는 동 안 의 낙 은 장 성 이요,죽은 후의 번영은순창이라고 예언 하였던신라원효대사의말그대로이다. 이와 같이 산수 좋은 고자에서 어찌 어 진 인물이 태어나지 않았으리요 근대 이 조시대만 보더라도 문정공(文正公) 김 하서(金河西) 선생남은 십팔선정(十八 先正)에서, 그리고 기 노사(奇 蘆沙) 선 생님은 만민의 도학(道學)자요, 이조시 대 에 청 백 리 로 이 름 을 떨 친 많 은 인 물 중 에 박수량(朴守良) 선생님을 손꼽을 수 있다. 정혜공(貞惠公) 박수량(朴守良) 선생 님의 경력과 업적을 알아보려면 선생님 의 부조묘 사당이 모셔진 장성군(長城 郡) 황룡면(黃龍面) 아곡리(莪谷里)의 청백당을 찾아가면 된다. 이곳에는 공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면서 조상들의 산소를모시고있다. 나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3세 되던 해 에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였으나 아직까 지우리일가들이많이살고있다. 이곳을 찾아가려면 장성역에서 서북 쪽으로 발길을 돌려 약 1시간30분 남짓 걸어가야 한다.가다 보면 허리를 굽히고 누워 있는 듯 산줄기가 좌우로 쭉 뻗어 감 싸 고 있 는 마 을 이 있 는 데 이 곳 이 공 의 탄생지이다. 앞이 트이고 땅이 기름진 이 마을로 들 어서면 도로변에 숱한 옛 사연들을 말해 주는 듯 한 하마비(下馬碑)와 신도비(神 道碑)가 눈에 띈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 청백당에 올라가면 사방이 훤히 트이고 높 직 한 자 리 에 세 워 져 있 는 정 자 에 까 만 붓글씨로 채호정(採好亭)이라고 쓴 간 판을 볼 수 있다. 바로 옆에는 연못이 있 고 연못 한가운데는 난초와 화초들이 계 절에 따라 피고 지며, 맑은 물에는 고기 떼들이한가롭게헤엄치며놀고있다. 정자 둘레에는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이 은행나무에는 정성스러운 흔적이서려있다. 나의 중조부께서는 이조 헌종(憲宗) 때 태어나셔서 23세 일기로 별세하셨다. 그 당시에는 조혼(早婚)이 성행하여 다 행히 돌아가신 지 7달 후에 증조모님께 서 옥동자를 낳으셨다.자손의 대가 끊어 질까 봐 크게 걱정하던 터에 온 가족들의 기쁨은이루말할수 없었다. 고조부(高祖父)님께서는 조부님이 태 어나신 날을 기념하기 위해 은행나무를 심기로 하셨다.구덩이를 파고 먹물을 갈 아 마무판자에 ‘우리의 자손도 은행나무 가지처럼 번성하기를 바란다’는 뜻의 글 귀를 적어 구덩이에 넣고 식수를 하셨다. 그 뒤부터 이상하게도 독자로 이어지던 자손이 5형제 6, 7남매로 불어났으며 그 후로도 계속 다복하게 되었다고 한다.사 당과 정각이 자리한 곳에서 뒤로 돌아보 면 높직한 보룡산 줄기가 좌우로 감싸고 있고,정면가까운곳으로는노적봉을올 려다볼수있다. 이 노적봉은 마치 가을 추수를 한 농가 에서 쌓아놓은 벼 무더기처럼 보인다.노 적봉을 돌아서 흐르는 황룡강의 물줄기 는 굽이굽이 은빛 깔을 넘실거리며 보는 이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그리고 먼 곳으로 고개를 들어보면 호남의 명산인 광주의 무등산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문자 그대로 산 좋고 물 좋은 명소에서 시(諡) 정혜공이 태어난 것은 너무나 당 연한일이며,그로써우리고장의자랑을 하나 더 늘려주는 것이다. 이 연못가 옆 에 대문이 하나 서 있고, 대문 처마에 청 백당 현판이 걸려 있다. 대문 안을 들어 서면 정혜공의 부조묘 사당이 정갈하게 버티고 있다. 400평의 널직한 뜰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청백당에는 사방이 시원 스럽게 터진 대청마루가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라는듯길손을유혹하고있다. 공(公)의 증손이야말로 청백당의 역 사와 함께 살아오신 산 증인이시다.대대 로 터 를 잡 고 살 고 있 는 후 손 들 이 집 성 촌 을 이루어 살고 잇는 터라 대청마루에는 공의 후예들이 앉아 있기가 일쑤다.길손 들은 그들을 통하여 청백당에 얽힌 사연 들을자세히들을수있다. 정혜공이나 청백당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에는 이곳에 앉아 계시는 종손과 후 예들이 안성맞춤이다. 이들은 청백당에 관한 이야기라면 피곤한 기색도 없이 즐 거이 이야기해 주신다. 그도 그럴 것이 종손(來聖 氏)의 20대조이신 사정공(德 明 氏)께서 이곳에 들어오셔서 집을 짓 고 살기 시작하면서 혈맥은 간단없이 이 어져내려와오늘에이르렀기때문이다. 청백당은 임진왜란과 6븡25전쟁 두 차 례에 걸쳐 난리를겪으면서 모두 다 타버 렸다. 그러나 20대로 이어오는 후손들은 곧 청백당을 재건하여 앞서 가신 조상님 들을추모하고있는것이다 조상들의 뼈가 묻혀 있는 곳,조상들의 얼이 서려 있는 곳, 아니 지금도 조상들 의 입김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에 그들은 그곳을 떠나지 않고 늘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것이다. 청백당이란 이름이 붙여진 유래는 이 러하다. 뱚기네스북의학호(鶴湖) 일기 자신의일상과 주변을 돌아보기 힘든 시대에 자신을 돌아보고 지나온 흔적 을찾아볼수있는것은일기가아닐까생각해본다.‘학호일기’는어렸을적 부터 하루하루를 꼼꼼히 기록해놓은 학호 박래욱 선생의일기이다.1948년 10살 때 사자소학을 배우면서 어머니의권유로 시작된 일기쓰기는 82세가 된지금도그기록은이어진다.6·25전쟁으로일부를잃어버렸지만1950년 부터 지금까지의일기는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이제 문화재로 이어갈 것 이다.본보에서는 지난호 50여년 전 농월정에서 맺은 일가의정을 소개한바 있다.이번호에서는일기중‘내고장인물과유물자랑’중고향장성과선조 청백리아곡박수량선생의생가청백당에얽힌사연을소개해보고자한다. 뱚8대절경(絶景)의하나 뱚청백당(淸白當 )에얽힌사연 청백당:학호선생의 고조부께서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아름드리 서 있다. 사진은 지난겨울에 촬영한 것으로 맨위가부조묘이다. 한빛신문은 정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한빛신문은 최근 일정을 변경하여 봉행된 시조대왕 추향대제에 관하여 어느누구로부터 연기등행사일정 에 대해 전혀 통보를 받 지 못했습 니 다. 그 럼 에도 불구 하 고 보도를 하 지 않았다면서 일 부 편협한 사람 들이 네 편 내편 하 면 서 정쟁의 중심 에 올 려 놓 고 온 갖 중상모략 으로호도하고있어매우안타깝기그지없습니다. 신문의 기사는 현장의 소 리를 그 대로 전달하 는 것 으 로판단은독자들이하고있는데도불구하고경찰에고 소하여편집방향과논조길들이기를하는것은옳지않 습니다. 또 자기네들 입맛에 맞지 않다고 방대한분량 의 악의적인 유 인물 을 만 들어 배 포 하 면 서 조 직적으 로 구독과구독료납부를 방해하는일은후손들에게 물려 줄 방대한 자 료를 정 리해온 한빛 신문과 시조 할아버지 이하모든성손들의화합을저해하고앞길을막는행위 입니다. 한빛신문은 그동안 선조님의 행장과 종중의 약사 집 성촌, 본관별 세거지 변천사 등 수많은 자료를 기록으 로 남기는 방대한 작업을 하고 있어 ‘성손모두가 만들 어가는 종보’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어 이들의 농락에도 흔들림 없이 선조님의 현창사업과 후손들에 게 물 려 줄 박 문(朴門)의 뿌리를 연구하 고 다듬어 데이 터베이스화하는데앞장서겠습니다. 한빛신문임직원일동 ※제보및구독신청안내: 뱚053-588-7300,070-4250-0078 뱚fax053-581-0067 뱚e-mail:parkss1012@hanmail.net ※ 성손여러분이 납부하여주신 소중한 구 독료는신문발행에큰도움이됩니다.후원 에감사드립니다. 뱚뱚▶구독료및후원금계좌: 뱚뱚뱚뱚453013-55-000691농협한빛신문 ※한빛신문독자여러분1인2명의구독자 배가운동에 적극 동참하시여 한빛신문이 더 많 은 자 료 를 만 들 어 후 손 들 에 게 물 려 줄 수있도록힘을실어주시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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