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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10월31일 수요일 2 (제142호) 기 획 일연은 포석정 사건을 도대체 어떤 관점에서 보았던 것일까. 일연은 이에 대해 뚜렷한 자기 생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 았다. 대신, 포석정 사건의 관련 내용을 엉뚱한 곳에 옮겨 실어 의도적 혼선을 조장, 다시 한 번 간접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밝 혔다. 븮삼국사기븯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 겨울 11월에 서울을 습격하였다. 이 때 왕은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어찌할 줄 을몰랐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으로 뛰어 들어가고,친척과 공경대부 및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고 숨었다.적에게 붙잡힌 자 들 은 귀 한 자 천 한 자 할 것 없 이 놀 라 고 진 땀 을 흘 리 며 엎 드 려 노복이 되겠다고 빌었으나 화를 면하지 못했다. 견훤은 또 한 군사들을 풀어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 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왕을 찾게 하였 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을 데리고 후궁에 있다가 군영으로 잡혀 갔다. 견훤은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간 하고,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비첩들을 강간하게 하였다. 그리 고 왕의 아우 뻘 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 였다. 以冬十一月,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倉猝 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四散, 奔走逃竄. 其爲賊 所虜者, 無貴賤皆駭汗匍匐, 乞爲奴僕而不免. <萱>又縱其兵, 剽掠公私財 物略盡, 入處宮闕, 乃命左右索王. 王與妃妾數人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 自盡, 强淫王妃, 縱其下, 亂其妃妾. 乃立王之族弟, 權知國事, 是爲<敬順 王>. 븮삼국유사븯권2기이2김부대왕(金傅大王) 견훤은 그 해 11월에 신라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 빈(妃嬪) 종척(宗戚)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간에어찌할줄을몰랐다. 왕과 비(妃)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땅에엎드려노비(奴婢)가되기를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公私間)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 궁(王宮)에 들어가서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하니왕은비첩(婢妾)몇사람과후궁에숨어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自決)해 죽게 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嬪妾) 들을 모두 욕보였다.왕의 족제아우 뻘(族弟)되는 부(傅)를 세 워왕으로삼으니왕은견훤이세운셈이되었다. 萱以. 冬十一月. 掩入王京. 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 倉卒不知所爲. 王與妃奔入後宮. 宗戚及公卿大夫士女. 四散奔走. 爲賊所 虜. 無貴賤匍匐. 乞爲奴婢. 萱縱兵. 剽掠公私財物. 入處王宮. 乃命左右索 王. 王與妃妾數人. 匿在後宮. 拘致軍中. 逼令王自盡. 而强淫王妃. 縱其下 亂其嬪妾. 乃立王之族弟傅王. 王爲萱所擧卽位븣.(븮三國遺事븯 권2기이2김 부대왕조) 일연은 븮삼국사기븯의 경애왕 4년조의 내용을 븮삼국유사븯에 고스란히 옮겨 실었다. 한데 멀쩡히 경애왕조가 있음에도 그 곳이아닌‘김부대왕’이란제하의엉뚱한곳에전재하였다. 대신 경애왕 조에는 불교 역사상 최초의 선교 일치를 꾀한 법회가 열렸음을 들어 경애왕의 위업을 은연중 추켜세우고 있 다. 븮삼국유사븯권2기이2경애왕(景哀王) 제55대 경애왕(景哀王)이 즉위한 동광(同光) 2년 갑신(甲 申; 924) 2월 19일에 황룡사(皇龍寺)에서 백좌(百座)를 열어 불경(佛經)을 풀이했다.겸해서 선승(禪僧) 300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대왕(大王)이 친히 향을 피워 불공(佛供)을 드렸다.이 것이 백좌(百座)를 설립한 선교(禪敎)의 시작이었다. (븮三國遺事 븯권2기이2경애왕조) 이것은 포석정 사건과 김부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며,따라 서 경애왕의 죽음에 김부가 깊숙이 개입되었음을 은연중 암시 하려한일단이라짐작된다. 또 김부가 견훤에 의해 세운 바 되었음을 지적하는 것도 일 연은 빠뜨리지 않고 있다. 김부를 겨냥한 일연의 여러 행위들 은 눈여겨볼수록 더욱 도드라지며, 견훤과 김부 양자 간의 연 루와음모를한층짙게암시하고있다. 일연은 이밖에도 븮삼국사기븯에 수록된 포석정 관련 사론을 전재하기도 했다. 특히 척불을 주장하는 븮삼국사기븯 사론을 한 점여과없이그대로인용했다. 븮삼국사기븯신라본기12경순왕9년사론 史論曰 中略 신라는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서고,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었으니,군사와 농사지을 사람이 점 점 줄어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가 문 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때에 이르러서 경애왕은 더욱 황음하게 되어,궁인과 근신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을 마시며 연회를 하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 지못하였으니,이것이 문밖에 한금호가온 것을모른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 여화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 름이없었다. 김부식이 작성했을 것으로 짐작되는,위 사론의 주요 핵심은 두 가지, 즉 척불(斥佛)과 경애왕에 대한 비판이다. 한데 위 사 론은아래븮삼국유사븯에그대로전재돼있다. 븮삼국유사븯권2기이2김부대왕조말미史論 史論曰 中略 신라는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서고,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었으니,군사와 농사지을 사람이 점 점 줄어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가 문 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때에 이르러서 경애왕은 더욱 황음하게 되어,궁인과 근신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을 마시며 연회를 하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 지못하였으니,이것이 문밖에 한금호가온 것을모른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 여화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 름이없었다. 불교를 찬양하기 위해 만든 책에 불교를 비판한 내용이 여과 없이 전재되어 있다. 이것은 괴이하기 짝이 없으며 모순에 가 까운 행위다.왜냐하면 일연이 븮삼국유사븯를 집필한 데에는,불 교를 찬양하고 미화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포함되어 있었기 때 문이다. 븮삼국유사븯를 집필한 각고의 노력 전부를 무위로 돌릴 수도 있는, 어쩌면 숭불과 찬불의 전체 의미를 훼손시키고 뒤집어 버릴, 이 위험한 장난을 일연은 왜 구태여 벌인 것일까. 일연의 이러한 고의적인 우(遇)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며,어떻게 받 아들여야만하는것일까. 대체로 인정하기 힘든 내용이 있을 경우, 나타날 저항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내용을 싣지 않음으로써 직접적으로 거부 하는 경우와, 외려 내용을 그대로 옮겨 타인들이 자연스레 그 허위와모순을깨닫게재촉하고조장하는경우다. 전자가 자기 주도적이지만 이설(異說)을 부를 수 있음에 비 해, 후자는 자신의 의견을 철저히 배제하지만 철저한 부정을 이끎으로써,더큰저항과냉소의의미를지닌다. 일연은 후자의 방법을 택했고 겉으로는 긍정의 형태를 띠나, 실은 븮삼국사기븯 기록 전반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저항을 유도 하고드러냈다. 유(有를) 내세워 무(無)로 만드는 불교의 화두가 느껴지는 대목이다.이른바 일연이 만든,‘일연 판version븯색즉시공이기 도 했 다 . 다시 말해 일연은 포석정 사건과 척불에 관한 한, 상식의 선 을 뛰어넘는 집필 방식을 통해 븮삼국사기븯에 대한 일대 반격을 꾀한셈이된다. 일연의 븮삼국사기븯 사론의 표절븡전재야말로 경애왕을 비판 하고불교를배척한븮삼국사기븯사론에대해냉소적이고역설적 인 저항과 부정을 이끌어 내려, 일연이 취한 고도의 계산된 필 법이아닌가여겨진다. 일연은 븮삼국사기븯 사론을 전재하는 방식을 통해, 그 허구성 을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이것은 사론의 반박 차원에서만 끝 날, 그리 간단하고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론의 내 용은븮삼국사기븯열전과도맥락이서로맞닿아있기때문이다. 경애왕이 시해된 포석정 사건에 대해, 일연은 적어도 븮삼국 사기븯와는다른생각과입장을지니고있었다. 일연은븮삼국사기븯사론을그대로 전재하거나,또 경애왕 4년 11월조의 내용을 ‘경애왕’조가 아닌 ‘김부 대왕’조에 옮겨 넣는 등, 다소 엉뚱하고 심지어는 파격적이기까지 한 집필 방법을 동원,실수를가장한채로,문제를더욱부각시켰다. 이는 포석정 사건의 음모 및 기록 과정 등 일체의 문제점을 인지했던 일연이 행한 최선이자,동시에 마지막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것이기도했다. 고도의 계산되고 의도된 일련의 행동 저변에는 다음과 같은 시대배경이깔려있었다. 비록 일연이 진실과 진리,불법을 목숨처럼 여긴 지성인이었 겠으나,그러기에앞서그는한사람의고려인이었다. 또 고려 왕실의 남다른 관심과 배려를 한 몸에 받아 왔던, 부 인할 수 없는 어용 승려였다. 그런 그가 고려왕조를 상대로 왕 건의 흠결이 일거에 드러날 포석정 사건의 진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기는실로어려웠을것이다. 달리 더 좋은 방편이 없던 일연으로선 자신의 깊은 뜻을 숨 긴 채, 이 같은 전재(轉載)나 배열 오류 등의 문제를 일으켜, 븮삼국사기븯 원문이 지닌 문제를, 문제로 답하였다고 여겨진 다. 그러나 일연은 한편으로 끝까지 김부를 신라왕이 아닌, ‘김 부 대왕’이라 칭하여 신라왕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등, 의도적 으로 포석정 사건이 신라 최종 멸망의 순간이었음을 밝히는 것 에주저함이없었다. 포석정과 관련하여 븮삼국유사븯에 나타난 각 대목마다 일연의 고뇌어린결정과회한이순간순간드러난다고할수있겠다. 한편 경애왕 추종 세력들은 경애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김부 무리들의 조치에 불복, 반감을 가졌을 것인데, 견훤과 김부에 대해 반감을 가진 세력의 존재는 실제 기록에서도 여실히 확인 된다. 고창의 토호 김행 등이 경애왕에 대한 설욕을 가슴에 품 고견훤에대한타격에나선것이확인되기때문이다. 김행은 나라의 종성(宗姓)인데…中略…무리에게 의논하기 를, 견훤이 경애왕을 죽였으니 견훤과는 의리상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다. 어찌 왕공(王公)에게 귀순하여 우리의 치욕을 씻 지않으랴했다.( 븮신증동국여지승람븯권24안동대도호부 인물조 ) 경인(庚寅)에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 김선평(金宣平) 으로 대광(大匡)을 삼고 권행(權行)과 장길(張吉)로 대상)大 相)으로삼았다.( 븮高麗史븯卷2世家2太祖213년정월조) 김행은 나라의 종성(宗姓)인데,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했다 는 소식을 듣고 (참아오던 중 이 때를 당하여) 무리에게 의논 하기를, “(견훤이 우리의 임금 경애왕을 죽였으니) 견훤과는 의리상 하늘을 함께 할 수 없다. 어찌 왕공(王公)에게 귀순하 여 우리의 치욕을 씻지 않으랴?”하고 드디어 고려에 항복했다. 고려왕이 기뻐하여 이르기를, “행은 능히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달하였다.”하고는 성(姓)을 권씨(權氏)로 내렸다. (븮동사강목븯 5下김부 4년정월21일조) ※ ( )안의 내용은 필자가 전후 내용을 고려하여 추가한 것 임. 고창에서 견훤을 제압한 직후 그들은 김부를 버리고 왕건에 게 투항했다. 경애왕에 대해 충군애국을 품었던 그들이 정작 김부에 대해선 눈곱만큼의 충성심조차 품기는커녕 왕건에게 일거에귀화해버렸다. 이것은 그들이 견훤과 김부를 같은 선에서 이해하고 있었으 며아울러거센반감마저품고있었던결정적증거가된다. 이들의 행위로 보아 김부의 행태에 불만을 지녔을 세력의 존 재는 당연히 있음직하고 자연 김부 일당에 의해 추진된 경애왕 장례에도불만을가졌음이분명하다. 그렇다면 경애왕의 유품, 산골(散骨) 등을 모아 자기네들끼 리 비밀리 무덤을 따로 성토했을 것이다. 지금의 경애왕릉은 그런자취와흔적에다름아닌가싶다. 고려가 건국되고 258년이 지난 시점에 김사미 등이 신라 부 흥 운동을 일으킨 것에서 보듯 고려에 대한 반감은 해소되지 않았고,거꾸로 신라에 대한 아련한 향수는 잔존했다고 짐작된 다. 그리고 왕의 아우뻘 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 게 하였다. 이 사람이 경순왕이다. 乃立王之族弟 權知國事 是 爲敬順王. (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 위 기록을 보면 견훤은 김부에게 권지국사의 임무를 맡겼다. ‘권지’란임시로직책을맡는것을말한다. 김부는 ‘화백’이라 불리는 ‘귀족회의’에서 중망을 쫓아 택군 擇君된 것도 아니며, 정통성에 따라 계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반란 세력 견훤의 힘에 의해 임시로 국사를 대신한,이른바 ‘괴 뢰정권’의수장에불과하다. 븮삼국유사븯에서굳이김부대왕이라이름을칭하고 있는점이 나, 븮삼국사기븯일부 대목에서 김부를 왕이 아닌 권지국사로 밝 힌지적에서,김부를신라의왕으로도저히인정하긴어렵다. 그런즉 포석정 사건을 계기로 견훤에 의해 신라 왕조와 왕실 의 근간은 붕괴해 버렸다.927년 11월 반란 세력 견훤과 일신의 영달에만 눈 먼 김부에 의해 천년 왕조 신라의 전통과 정신과 사직은일거에무너졌다. 권지국사 김부는 이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왕건에게 귀부 해 버렸다.치국의 경륜조차 없이 권력만을 부나방처럼 쫓았던 한 인간의,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었다. 이로 보면 포석정 사건이야말로 신라 멸망의 순간으로 기억되었을 것이 틀림없 다. 이런 점에서 신라 부흥에 대한 민심이 고조될수록, 반란과 음모로 빚어진 포석정 사건의 희생양에 대한 추념 역시 어떤 형태로든제기됐을개연성은크다. 김부는 왜 정상적인 방법을 제쳐두고 굳이 반란세력 견훤과 결탁했는가? 내응을 빼고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절대 왕위에 오를 수 없었 던 것일까.그에 대한 문제 제기는 지금껏 없었다.왜 이런 일이 도대체발생했던것일까? 포석정 사건이 권력 쟁탈전의 일환이었고,그 과정에서 김부 븡견훤과의 협잡이 이뤄졌다면 김부 일가의 부침과 동향은 매 우긴요한실마리일것이틀림없다. 만일 김부가 견훤과 결탁하여 경애왕 거세를 도모했다면,그 자체가 적잖은 민심이반,정치적 모험이 서린 결행은 아니었을 까?그러했을가능성은다음에서충분히짐작이가능했다. 견훤은 또한 군사들을 풀어 공공의 재물이나 사사로운 재물 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대궐에 들어 앉아 측근들로 하여금 경 애왕을찾게하였다.(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2경애왕4년11월조) 견훤은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약탈하고, 사람을 시켜 경애 왕을잡아다가자기앞에서죽였다. 그는 곧 내궁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끌어다가 강간하고, 왕의 친족 동생인 김 부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한 뒤에,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을 포로로 잡고, 또한 국고에 있는 재물 과 귀중한 보배와 군기,자녀와 백공 가운데 솜씨 좋은 자를 빼 앗아자신이데리고돌아갔다. (븮三國史記븯권50열전10견훤조)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 가거처했다.(븮三國遺事븯권2기이2김부대왕조) 견훤의 보복은 경애왕 시해로만 끝나지 않았고,여러 분탕이 뒤따랐다.이런 맥락에서 김부가 견훤을 불러들인 행위가 알려 질 경우, 정치적 후폭풍도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실제 훗날 고 창토호들은김부에게서일제히등을돌리기도했다. 김부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선 김부 일가에 얽힌 과거 행적 을살펴볼필요가있다. 김부의 가계를 거꾸로 올라가 보면, 김부의 아비는 효종, 조 부는 인경,증조는 민공,고조는 김안(金安),5대조는 문성왕이 다. 다시 왕위 및 관직만을 기준으로 보면 5대조는 왕이지만, 이후 고조부터 김부까진 왕위에서 배제된 채 권력 주변을 맴돌 고있다. 아래에서는 문성왕에서 김안(金安), 민공, 인경, 효종과 관 련된 기록을 뽑아 가면서 일가와 권력의 밀착 정도, 치부를 추 적하여보자. 김부의 5대조 문성왕은 염장을 사주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유명한 장보고를 죽인 것은 물론, 5년 뒤엔 해상 무역 기지 청 해진을완전히폐쇄하고허문장본인이다. 8년 봄, 청해진의 궁복이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지 않는다고 하여 왕을 원망하며, 청해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중 략….술에 취하자 염장은 궁복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벤 후에,그 의 무리를 불러 사유를 설명하니, 그들은 엎드려 감히 움직이 지못하였다. (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문성왕8년조) 13년 봄 2월,청해진을 없애고,그 지방 사람들을 벽골군으로 옮겨살게하였다. (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문성왕13년조) 신라 경제와 정치는 이후 내리막길로 급전직하했다.기실 신 라의 추락과 붕괴는 문성왕의 손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라벌로 들어오던 경제적 교역의 이점(利點)은 삽시에 연 기처럼사라졌다.정국은불안했다. 븮삼국사기븯문성왕 조에 잇달아 보이는 숱한 화재 기사와 기 상이변등은그방증이다. 13년여름4월,서리가내렸다. 14년봄2월,조부에불이났다. 14년 겨울 11월,왕태자가 죽었다. 15년여름6월,홍수가났다. 15년가을8월,서남지방의주와군에메뚜기떼가나타났다. 17년 겨울 12월, 진각성에 불이 났다. 토성이 달에 들어갔다. (이상은븮三國史記븯신라본기11문성왕조에의거함) 재위 14년에는 왕위를 이을 후계자인 태자가 갑자기 죽기도 했다. 이 일련의 사단은 불안정한 신라 사회를 잘 보여주는 직 설적 사례다. 문성왕은 신라 쇠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러한여파에말미암은것일까? 19년 가을 9월, 왕이 병환이 들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 다. “과인이 미미한 자질로 높은 자리에 처하여, 위로는 하늘에 죄를 짓지 않을까 두려워하고,아래로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주 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밤낮으로 깊은 물과 얇은 얼음을 건너 는 듯 전전긍긍하면서도, 세 명의 재상과 여러 신하들의 보좌 에 의지하여 왕위를 유지해왔다. 이제 갑자기 병에 걸려 열흘 이 지났으나 정신이 혼몽하다. 아침 이슬 보다 빨리 세상을 떠 날지도 모른다.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사직에는 주인이 없을 수 없으며, 국가의 정치에 관한 모든 사무는 잠시라도 폐할 수 없 다. 돌아보건대 서불한 의정은 선왕의 손자요, 나의 숙부이다. 그는 효성과 우애가 있고 명민하며 관후하고 인자하여,오래도 록 재상의 직에 있으면서 왕의 정사를 도왔으니, 위로는 종묘 를 받들 만하고, 아래로는 창생을 기를 만하다.이에 나는 무거 운 책무에서 벗어나, 어질고 덕 있는 이에게 그것을 맡기려 하 는 바, 그것을 부탁할 적임자를 얻었으니,다시 무슨 여한이 있 으랴?중략….너희 여러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충성할 것이며, 가는 사람을 장례지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혹시 라도 예절을 어기지 말 것이다.나라 전체에 포고하여,나의 뜻 을 분명히 알게 하라!” 왕이 7일 만에 별세하였다. (븮三國史記븯 신 라본기11문성왕19년조) 그는 아들 김안이 있었음에도 숙부 헌안왕에게 양위했다.즉 김부 일가의 왕위 배제는 5대조 문성왕의 결단이 빚은 일종의 자승자박에서이미출발하고있었다. 경애왕(신라55대왕.재위924~ 927) 뱚역사비정(22) 뱛Ⅰ.경애왕시해의주범이김부임을암시. 박 순 교 뱛Ⅱ.븮삼국사기븯모순을역설적으로 비판 뱛Ⅲ.븮선문답븯에가까운일연의문제제기 뱛Ⅳ.왜현재의경애왕릉이생겼는가 뱛Ⅴ.김부일가가왕위계승에서밀린까닭 목 차 Ⅰ.경애왕시해의주범이김부임을암시. Ⅱ.븮삼국사기븯모순을역설적으로비판 Ⅲ.븮선문답븯에가까운일연의문제제기 Ⅳ.왜현재의경애왕릉이생겼는가. Ⅴ.김부일가가왕위계승에서밀린까닭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