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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도는 안동(安東)군 예안(禮安)면 하계(下溪)리에서 퇴계(退溪)의 후예로 태어났다. 1866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875년에 지평(指平)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으며, 1876년 집의(執義)가 되었다. 이 때 일본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반대하여 격렬한 상소를 올린 최익현(崔益鉉)을 변호하다가 파직되었다. 다시 양산(梁山)군수로 복직되었을 때에 양산지방에 크게 흉년이 들자 구휼미를 방출하고 조세를 감면했으며 가렴주구가 심한 관찰사를 면박하여 사과를 받았다. 1882년에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명되고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 되었으나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몰두하였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만행이 자행되자 예안에서 의병을 일으키어 의병대장이 되고 부장(副將)에 이중린(李中麟)을 임명하여 안동의 의병대장 권세연(權世淵)과 연합해서 안동지방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조약에 찬동한 을사5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강경한 상소를 올리었다.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마침내 나라가 망하기에 이르자 이 소식을 듣고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죽음으로써 항거하기로 하고 유서를 지어 놓고 단식을 시작해서 24일만에 절명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