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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하고 이회영 정화암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정의공보를 발간하였다. 한편 상해에서 영국인이 경영하는 철공장 직공이 되어 중국 동지 노검파 대만 동지 범본양, 아나키스트 연맹과 손을 잡고 노동자의 사상 계몽에 진력한 결과 의사를 따를는 군중이 10만을 헤아렸다. 1927년 남경 상해 등에 있는 조선 중국 동지들을 모아 복건 천주 등지에서 농민자위군으로 민남 25현 민단편련처를 조직하여 공산군과 지방토비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고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남경에서 조선 중국 일본 필리핀 안남 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을 때와 1930년 재북만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을 때도 의사는 조선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일제 탄압의 만행을 규탄하고 독립의 정당성을 세계 만방에 호소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의사는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화남아나키스트 연맹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과 제휴하여 항일해방연맹을 조직하고 1차 상해사변이 일어난 후엔 흑색공포단(B.T.P)을 조직하였으며 이여산 동지와 천진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1만5천톤급 일본 수송함을 대파하고 왜군 병영과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했으니 서사 항일의 투혼은 크게 빛났다. 1933년 3월 17일 의사는, 일본이 중국 군벌들을 매수하기 위하여 유길명 주중일본공사가 마련한 상해 무창로에 있는 육삼정이라는 일본 요정에 일군정요인과 중국의 친일거두들을 초대하여 대연회를 갖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즉시 정화암과 밀의한 후 이강훈 원심창 동지들과 함께 그날 밤 9시 일격 전멸을 시도했으나 적의 역습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 뒤 일본 장기법원에서 무기형을 받고 복역 중 1934년 6월 5일 밤 11시 일본 장기 형무소에서 39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의사의 유해는 해방이 된 다음해야 조국의 품에 안기셨으니 1946년 7월 6일에 지금의 효창원에 국민장으로 안장되었으며 1956년 10월 30일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