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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목포 양동교회의 건축사적 가치 김지민/ 목포대 건축학과 교수 1. 목포 선교사업의 시작 미국 남장로회 한국선교회는 1894년에 호남지방에서는 처음으로 전주에 스테 이 션을 개설하였고 그 다음으로는 나주에 스테이션을 개설하기로 하였다. 당시 나 주 는 영산강 상류에 위치했던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전남 제일의 큰 고을이였 고 인구도 제일 많았다. 1897년 이른 봄 나주스테이션 개설을 위해 유진벨(Rev. Eugene bell, 한국명: 배유 지) 목사 1) 와 해리슨 (W.B.Harrison, 한국명: 하위렴) 목사가 나주에 파견됐다. 그들 은 나주 성안에 있는 초가집을 매입, 임시 숙소로 정하고 전도를 시작하였다. 그러 나 나주는 옛날부터 유교적인 양반 세력이 강한 지역이어서 선교사들의 활동을 용 납할 사회 분위기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종래에는 청년들을 동원하여 계속 위협을 가함으로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철수할 수 밖 에 없었다. 이때 나주 이외의 지역으로 유리한 선교지역으로 떠오른 곳이 목포였다. 목포는 장차 발전 가능성이 확실 한 지역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선교부는 벨 목사와 레이 놀즈 목사로 하여금 목포에 선교기지를 구축하도록 하여 1897년 가을 경부터 본격 적인 목포 선교가 시작된 것이다. 이와는 별도로 이미 1895년 6월 선교사 월례회에서 목포에 유진벨과 레이놀즈를 선교사로 파견하려는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 특별한 계획이란 목포를 한국의 서남 해권 선교의 전진기지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목포가 자유무역항이 된다면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일은 물론 중국대륙을 연결하는데도 좋은 위치임을 예견하 고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을 잇는 한반도의 출입구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1) Rev. Eugene bell (1858. 4. 1.~1925. 9.) 배유지(裵裕지)목사 1891년 미국 캔터키주의 Centeral 대학을 졸업했고,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으로 1895년 4월에 한국에 들어왔다. 그 후 주로 목포와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1897년 10월 1일 목포항 개항과 더불어 목포에 외국인 주재가 허용되었으므로 1898년 가을 배유지 목사 부부가 서울에서 목포로 이주하여 목포 선교부(Mokpo Station)를 설치했 고, 오웬선교사가 이들과 함께 일했다. 이 때 스트래퍼양이 부녀자와 어린이의 전도를 위해 목포스테이션에 합류했다. 배유지 목사는 1925년 9월, 광주에서 세상을 떠나 그의 둘째 부인과 함께 광주시 양림동 에 묻혀있다. 현재 광주 수피아여고에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고 광주시 양림동에 선교 기념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