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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 목포 프렌치병원의 유물이 목포근대역사관1관에 전시되어있다. 미국남장로교의 선교사역은 아니지만, 목포양동교회의 교인이었던 車南守 장로(1902~1990)도 목포지역에서 의료선교를 하였다. 그는 목포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중·고등학교 를 마친 후, 규슈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대구, 제주도를 거쳐 목포 대안동에 외과의원을 개설해 고향 환자들을 진료하였다. 신앙심이 뛰어난 아내 김사라가 정명여학교를 다녔기에 부부는 목포양동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80) 이때 목포에서 거지들을 섬기는 공생원 81) 에서 차남수 원장이 진료봉사를 하였다. 또한 그는 목포정명여학교 등의 校醫로도 봉사도 하였다. 6·25 사변 이후에는 목포적십자병원에서 환자 를 돌보면서 많은 목포 시민들에게 건강의 큰 혜택을 주기도 하였다(김수진 2011). 82) 최남수 장로의 유언의 일부를 적어본다. “본인은 긴 세월동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따르려 애써 왔으며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오직 의는 인술이라는 신념하나로 살아 왔기 때문에 여한이 없습니다. 본인의 마음의 요람이요, 가 슴속에 영상이었던 유달산과 정감 두터웠던 목포의 친지 곁을 떠나야 하는 아쉬움과 서러움 만이 있을 뿐입니다. 본인의 간절하고도 마지막 기도와 소원은 내 고향 목포인들이 서로 사 랑하고 서로 도우실 것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83) ※ 서양의료선교가 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차신정 2010) 84) 직접적으로는, 콜레라 만연 때의 시료나 종두에 의해서 질환이 미신과 악귀의 소행이란 공 포에서부터 한국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85) 사망률도 현격하게 줄었다. 또한 의료선교사들의 의 술과 함께한 기독교 신앙의 전파와 정착이 잘 되었고, 한국인 의료제자들이 뛰어난 의술과 아 울러 교회부흥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다(에비슨 1939). 86) 79) 「목포양동교회 100년사(1897-1997」, p. 88, 90, 174, 177, 180. 80) 1945년까지 목포양동교회 교인, 그 후 남부교회 설립. 81) 1928년 윤치호 전도사와 그의 부인 다우찌(田內鶴子)가 운영, 현제도 운영하며(원장 정애라) 76년의 역사 가운데 3,700여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자라서 사회에 나감. 82) 김수진, [장로열전 101. 차남수 장로], 한국장로신문, 2011년 7월3일 자. 그러나 9·28 수복이 되면서 차남수는 인민군을 치료해줬을 뿐인데 인민군 부역자로 총살당할 위기에 처했었는데 때마침 둘째 아 들인 차일석이 구국학생동맹단장이 되어 목포에 오게 되어 부친 차남수 장로를 극적으로 살려냈다. 83) 강문호,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 갈보리교회(차남수 장로의 딸인 차복희 권사가 출석하는 교회) 칼럼 2015. 12.5, 한 가지 더 소원은 모든 의료인들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대로 의술을 행하는 것이었다. 84) 차신정, 「한국개신교초기 그리스도를 나눈 의료선교사」, 캄인, 2010, p.243-256 참조. 85) 중국에서도 서양의사가 아스피린으로 열을 낫게 하니, 눈 파란 서양의사에게는 천 년 묵은 귀신도 꼼짝 못하고 쫓겨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재래의 미신적 기반이 흔들리게 된 것이(이관숙, 중국기독 교사, 1997 p.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