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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 - 되었다. 이는 목포가 무역항이어서 외국인 600명의 진료 65) 가 일조한 것으로 추정한다. 간호사 선교사로서는 베인 (M. R. Bain) 66) 이 1921년부터 1927년까지, 호슨(G. F. Hewson)은 1924년부터 1931년까지 67) , 1929년에는 휘손영이 목포 프렌치병원에서 간호부장으로서 의료 선교를 하였다. 68) 또한 레드롭(L. Lathrop) 69) 은 1911년부터 1931년까지 목포와 군산에서, 캘 리(Mrs Callie)는 1907년부터 1930년까지 전주와 목포에서, 매튜스(E. B. Mathews) 70) 는 광주와 목포에서 1915-1930년까지 간호사로서 의료선교를 하였다. 71) 1930년대에는 무시험제를 번복하여 조선총독부가 외국인 의사의 의사자격증은 인정하지 않아 서 일본 내무성 주관의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한국에서 의료시술이 가능했다. 그래서 목포 프 렌치병원에서의 외국인 의사선교사의 사역이 어렵게 되어 72) , 한국인 의사인 鞠淳弘이 맡은 바, 그는 1925년에 경성의전을 졸업한 양동교회 교인이었다. 73) 프렌치병원에서 1930년에 태 어난 그의 아들 鞠永棕은 전남의대 학장, 대학약리학회와 대한신장학회장을 지냈다. 74) 1932년 미국남장로회의 목포 프렌치병원의 진료는 입원이 277명, 총 입원일은 1932일, 대수 술 159건, 외래초진 2,122명, 총 외래진료 3,820명이였고, 한국인 의사 1명, 한국인 간호사 4 명이 의료선교를 하였다. 1937년의 진료는 169명이 입원, 초 입원일은 1,715일, 대수술은 106건, 외래초진은 1,428명, 총 외래진료는 7,897명이였다. 이 해에 한국인의사 崔 燮과 75) 한 국인 간호사 6명이 의료선교를 하였다. 76) 한국인의사 崔 燮(1904 ~1997)은 목포양동교회의 매칼리 선교사 77) 의 조사 최병호 장로의 아 들이었다. 미국 남장로회에서는 崔 燮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전액장학금 을 주었고, 그가 의학교를 졸업하자 프렌치병원에 근무를 한 것이다.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이동진료로 봉사를 하였으며(김수진 2014), 78) 목포양동교회의 장로로서(1948년) 주일학교 교장 과 제직회의 감사(1948-51년)와 심방대조(1951년), 구제부장(1952-3년)도 하였다. 79) 65) 일제강점기 목포부립병원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개항장지역에 설치되었고, 일본인 의사들이 진료를 했다. 그에 반해 부란취 병원은 조선인을 위한 병원이었다.(최성환 목포대학교 교수 의 2013. 10.30. 자료) 그런데 외국인 600명을 부란취병원에서 진료하였다는 것은 의술과 특히 수술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일본인들이 진료를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 66) Maria Rachel Bain. (김승태 · 박혜진, 「내한선교사 총람」, p. 149.) 67) Georgiana Florine Hewson, 한국이름은 許友善, 그녀는 순천으로 이동하여 의료선교를 하였고 광주에서도 사역하였으며 1946년 소천하였다. (김승태 · 박혜진, p. 297.) 68) 휘손영은 1929년 2백원을 양동교인들의 개척교회인 목포 연동교회에 헌금하였고 연동교회는 양동교 회가 10년간 양동교회 전도사가 순회 인도하였다. (목포양동교회 100년사(1897-1997), p.135-136.) 69) Lillie Ora Lathrop, (김승태 · 박혜진, p. 339) 70) Esther B. Mathews, (김승태 · 박혜진, p. 359.) 71) 이만열, 「한국기독의료사」, p. 402. 72) Ibid., p. 240-241. 73) 「목포양동교회 100년사(1897-1997」, p. 289. 그의 큰딸 福振씨는 독일에서 의학박사, 딸 梗씨는 내과를 전공의학박사.(광주민학회 자료) 74) 디지털 의사신문, 2012. 8.20, http://n132.ndsoftnews.com 75) 최성환 목포대학교 교수의 자료. http://m.blog.daum.net/cuteyoungja/8750934 76) Ibid., p. 684. 77) Henry Douglas McCallie(1877-1945), 한국이름 孟顯理로 신안 도서, 해남, 강진, 장흥, 진도, 완도 등지를 순회하며 교회를 개척하였고, 농어촌 젊은이들을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에 장학생으로 보냄. (김승태 · 박혜진, 「내한선교사 총람」, p. 362.) 78) 김수진, 「한국교회를 섬겨온 장로열전 1」. 쿰란출판사, 2014. p. 402-4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