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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 전도사 1명에 의해 12,596명의 진료와 400명의 입원과 370건의 수술을 하였다. 이 때 특기사항은 한국인 의학생 1명이 이 병원에서 훈련을 받았다. 의료선교는 진료뿐만 아 니라 의학훈련도 중요한 선교업무 중에 하나로 꼽힌다. 1918년에는 닥터 리딩햄과 간호사, 한국인 조수 13명과 56) 1명의 전도사가 동역하였고 14,020 명의 진료, 412명의 입원, 275건의 수술을 하였다. 57) 이때는 다니엘 컴밍(D. J. Cumming) 58) 은 루이빌과 콜롬비아 신학교를 나온 목사로서 1918년부터 영흥학교 교장과 목포 프렌치병원 을 감독으로서 병원전도를 하였다. 59) 1922년에 목포 프렌치병원에서 닥터 길머(W. P. Gilmer)가 1927년까지 5년간, 1927년부터 1931년까지는 4년간은 닥터 홀리스터(W. Hollister)가 60) 의료선교를 감당하였다. 61) 1928년에서 1929년까지 6병상 병원입원실과 30인실의 온돌방에서 연인원 600명이 입원치료 를 받았고,(1928년에만 269명 입원치료) 62) 12,000명을 진료하였다. 이 때 외국인 진료도 600 명을 감당하였고, 한국인 왕진은 104회나 이루어졌고, 216명의 국소마취 수술을 하였고, 전신 마취 수술을 900명에게 하였다. 63) 중환자를 지게로 모시고 병원을 왕래하였다. 64) ※ 이 때에 프렌치병원의 우수한 시설과 닥터 홀리스터의 뛰어난 수술능력으로 전국 13개 선 교병원 중에서 가장 많은 수술을 하였다. 177개의 병상을 갖춘 서울 세브란스의 658회의 전 신마취 수술보다도 242명을 더 수술하였다. 또한 국소마취 수술도 군산 병원다음으로 많았고 , 59개의 병상을 갖춘 평양 병원보다도 거의 두 배를 행하여 당시 최고의 수술 병원으로 부각 56) 한국인 직원 중에는 저자의 첫째 伯父인 車善伊께서 1920년대에 목포 프렌치병원의 총무과에 사무 장으로 근무를 하였다. 57) 이만열, 「한국기독의료사」, p. 408. 58) Daniel James Cumming, 金雅各 (1892-1971) 59) 김승태 · 박혜진, 「내한 선교사 총람」, p. 224. 60) William Hollister, 한국이름은 河理사, 그는 군산 야소병원으로 이동하여 7년간 의료선교를 하였 고, 건강의 악화로 귀국하였다. 61) 김승태 · 박혜진, 「내한 선교사 총람」, p. 304. 62) 한국감리교회사, pp. 181-183.(이만열 책, p. 318. 인용) 63) KMF, May, 1930, pp. 98-99. 64) 목포양동교회 자료집 (유진벨 재단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