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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8 - 닥터 리딩햄 선교팀은 1914년에는 8,901명을 진료하였고, 147건의 수술을 시행하였다. 이때 는 한국인 의사 1명과 의료조수 2명, 전도사 2명이 같이 진료와 더불어 기독교복음전교를 하 였다. 1914년에는 목포진료소가 조수의 실수로 건물과 의약품이 전소하였으나 미국의 프렌치 와 미조리주의 성요셉 교회가 5,000불을 헌금하여 2층의 석조건물을 짓게 되었다. 52) 목포진료 소 사역 후에 중병으로 미국에 귀국한 윌리엄 해밀톤 포사이드가 ‘프렌치 메모리얼’의 기부를 받아 병원을 세우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었다 (강경구 2014). 53) 1915년에는 진료실 화재로 한국인 조수 한명이 燒死하여 6명의 조수와 2명의 전도사와 같이 의료선교를 하였다. 이 때 5,466명을 진료하였고, 43건의 수술을 하였다. 이때는 전년도에 비 해 한국인 의사가 없었기에 진료도 39%나 줄었고, 수술은 전년도에 34% 수준이었다. 목포 부란취병원 54) 은 양동교회 본당보다도 70평이나 더 큰 규모로 2층 건물에 20개 넘는 병상을 갖춘 서구식 침대가 있는 입원실과 남녀 진료실, 사무실, 조제실 등을 구비하고 있었고, 좋은 의료장비와 스팀 난방시설이 있었다. 55) 1916년에는 입원실이 갖추어진 현대식 목포 프렌치병원이 설립이 되어 닥터 리딩햄은 한국인 의사와 같이 진료하여 연인원 12,916명을, 300명을 입원치료를 하였으며, 276건의 수술을 시 행하여 전년도 대비 6.4배나 늘었다. 1917년의 목포 프렌치병원에서의 의료선교현황은 닥터 리딩햄과 간호사, 한국인 조수 10명과 증은 인정하였다. 52) 김승태 · 박혜진, 「내한선교사 총람」, p, 341. 53) 강경구(광주전남주재기자), 뉴스파워 신문 2014. 5.16. 54) 사진은 목포양동교회 자료(유진벨 재단 자료). 富蘭翠병원 주소가 당시 호남정 6번지. 현재 양동. 55) R. W. Wilson, "Medical Work" p. 228.(이만열, 「한국기독의료사」, p. 373.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