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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4 - 정성껏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8) 닥터 오웬은 부둣가의 어부들에게 진료안내 전단을 나누어 주었으나 사람들은 좀처럼 내원하 지 않았다. 9) 그러다가 복어국을 잘못 먹고 생명이 위급한 환자를 치료한 다음부터 진료소가 소문이 났고 목포양동교회도 이름나기 시작하였다. 닥터 오웬이 오기 전까지 벨 선교사의 사 역은 어려움이 많았다. 벨 선교사는 전도지를 뿌리고 몇 번 설교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복 음전파를 할 수가 없었다. 대다수의 관리들과 상류층은 복음을 들어도 믿지 않았으며 기독교 도입자체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의료사역이 전개되자 복음 전파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Bell 1899). 10) 목포진료소(dispensary) 11) 닥터 오웬은 몇 달 동안에 400명을 진료하면서 전도도 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서울에서 사역하고 있던 닥터 조지아나 휘팅는 그의 아내가 되어 목포로 와서 부녀자들을 치 료하였고, 1901년 과로로 잠시 귀국하였다가 다시 내한하여 진료에 임하였다. 12) 오웬은 목포진료소 13) 에 각종 기독교 서적을 놓아 읽을 수 있도록 하였고, 약 봉투에 한글 로 성경구절을 써 놓고 벽에도 성경구절을 붙여 놓아 보이게 하였다. 14) 오웬은 성경 구절이 적혀있는 전단을 환자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때때로 큰 소리로 읽어 주기도 하였다. 진료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의 순번 대기표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써놓았으며, 성 경을 펴들고 그들에게 보여 주면서 읽게 하였고, 쪽 복음을 나누어주면서 읽게도 하였다. 그 들 중에는 큰 소리를 내어서 읽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안영로 1998). 15) 8) 안영로,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서울: 쿰란출판사, 1988.) p. 144-145. 9) Ibid., p. 258-259. 10) Eugene Bell, Letter to Mother, April 20, 1899. (기덕근, “병원선교가 복음증거에 미친 영향 : 광 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0, p. 44 재인용) 11) 목포양동교회 자료집(유진벨 재단 자료) 12) 김승태 · 박혜진, p. 523. 13) 목포야소병원으로도 기록되어있다.(위키백과사전) 14) 안영로,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p. 144-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