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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니다. 38도선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인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인 군 사대결은 한국 민족사에 비극적 원죄입니다. 일제하의 민족반역자들인 친일파들 이 반공이라는 면죄부를 받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오히려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사회 주 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용공주의자, 친북주의자들로 몰려 건국운동의 주역에서 내 쫓 김을 당하였습니다. 양동교회도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 도 하지 않은 역사의 무책임과 직무유기의 죄를 지을 순 없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하 나님께서 양동교회에 보내주신 목회자가 이남규 목사입니다. 그는 민족의식이 확 고 하고 지도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박연세 목사의 옥사 이후에도 일제는 해 방 전까지 한국교회를 통합하여 말살하려는 기독교탄압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남 규 목사는 이에 저항하여 연동교회 교우들과 함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양동교회 는 출옥 후에 교회로부터 추방당했던 이남규 목사를 담임목사로 기꺼이 모셨습니다 . 박연세 목사의 장례식을 집례하고 신사참배로 고난당하던 교우들과 함께 했던 그 는 낙심하고 좌절 가운데 있던 양동교회를 격려하며 교회 공동체 재건에 정성을 다 하 였습니다. 이남규 목사의 어깨 위에는 교회 재건과 또 다른 국가 재건이라는 두 과제가 얹 혀 있었습니다. 해방 정국은 혼돈이었습니다. 지도자에 따라 정치이념에 따라 사 분 오열되고 남북 분단의 갈등은 뜨겁게 고조되었습니다. 이남규 목사는 전남노회 를 재건하며 목포 독립 촉성회를 조직하여 이끌고 목포지방 입법위원으로도 지역을 대 표하여 정부수립에 앞장섰습니다. 그에게는 무정부 보다는 반쪽짜리 정부라 할지 라 도 치안을 안정시키고 민주헌정질서를 확립하는 것이 절실하였습니다. 1948년 5 월 10일 정부수립을 위해서 제헌국회의원 선출이 있었습니다, 이남규 목사는 목포 지 역사회와 교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국회의원에 선출되었습니다. 따라서 부 득 이 양동교회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목회활동은 해 방 후 양동교회의 양적 성장과 더불어 교회가 사회속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 가 하는 선교적 방향을 확고히 제시하였습니다. 교회는 신앙인격의 형성과 민주적 인 훈련을 통해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남규 목사는 뛰어난 통찰력과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면서도 섬기는 리 더 (Servernt Leader)로서 교회만의 지도자가 아닌 사회 지도자가 되야 한다는 것 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 니 다. 이남규 목사의 행정 능력과 정치 지도력은 중앙정부에 인정을 받아 초대 전 라 남도 지사로 발령받게 되었습니다. 이남규 목사는 교회만을 목회하는 자리에서 민 족을 목회하는 큰 목회, 즉 “목민(牧民)” 목회를 한 한국기독교역사의 드문 인물 이 었습니다. 양동교회 목회에도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고 제직회 부서를 조직하고 일꾼 들 을 민주적으로 세우고 안수 집사 제도 등 다양한 조직 구조를 창안하여 교회의 내 적, 외적 성장을 이뤄냈습니다. 이남규 목사는 목민목회의 뜻을 현실정치에 두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