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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3. 신사참배 반대와 절대신앙 3.1운동은 실패하였습니다. 독립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1운동은 일 제 로 하여금 조선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에 두려움을 갖게 해서 무단통치를 문화 통 치로 바뀌게 하였습니다. 일제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을 창간하고 조선인 관 료 양성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였습니다. 총칼이 아닌 사상과 언론을 통한 조선인 개 조 와 친일파를 통한 조선인 통치에 그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 중에 신사참배는 천 황 을 살아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종교화된 제의입니다. 조선민 족 의 민족적 정체성을 부정하고 기독교의 민족의식을 말살하려는 의도에서 시행된 고 도의 전략적인 통치행위였습니다. 1937년 중국과의 전쟁을 통해 세계정복의 야망을 펼친 일제는 조선을 병참기 지 화하며 인적, 물적 자원을 비롯한 모든 것을 군수품으로 총동원하기 시작하였습 니 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의 말과 이름, 신앙의 영역까지 일본화 하지 않을 수 없 었 습니다. “일선 동조론”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창씨개명, 국어(일본어)사용, 그리고 신 사참배가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신사참배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일 제는 신사참배를 종교행위가 아닌 국가의식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대다수의 조 선 교회는 이 선전에 회유당하였습니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는 신 사참배를 국가의례라고 결정하였습니다. 평북노회도, 순천노회도 신사참배에 참여 하 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제 30회 전남노회도 어떻게 결의할 것인가? 고민하였습니다 . 양동교회 목사이며, 전남노회 노회장인 박연세 목사는 노회원들의 뜻을 모아 다 음 과 같이 결의하였습니다.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참배는 국민정신통일을 위한 국가의식임을 인식하고 본 교회로서도 참배함이 국민의 당연한 의례인 동시에 교회의 지도상 선명한 태도 인줄 알아 이를 결의 시행하는 동시에 관내 각 교회에 통제하여 일반 교인으로 취할 것을 보였사오며 「제30회 전남노회 노회록」, 1938 다수결이 반드시 진리가 아닙니다. 때론 소수가 진리일 때도 있습니다. 노회의 결 의가 존중된다 할지라도 신앙양심의 소리를 거부할 수는 없습니다. 박연세 목사 는 모든 교회가 다 위의 결의를 존중하고 따른다 할지라도 자신은 결코 따를 수가 없 었습니다. 3.1운동 이후 2년간의 옥고를 치르고 목사가 된 민족신앙의 소유자 박 연 세 목사는 누구보다 신사참배의식의 강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코 그 는 황민화정책이 표방하는 천황숭배와 대동아 전쟁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주 일 예배시 강단을 통해 정면도전 하였습니다. “천황도 예수님의 심판의 대상이지 그 가 심판자가 될 수 없다.”, “교회의 설교는 일본어를 쓰지 않는다.”, “대동아 전쟁은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