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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는 550여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때 교회학교 아동부는 13개 반으로 나누어 운 영될 정도로 교회교육이 활발하였습니다. 한 때는 벨 선교사의 선교사역을 이어 받 은 프레스톤(J.F.Preston)선교사의 활동으로 노인층의 성장이 급증하기도 했지만 양 동교회는 유소년들을 향한 교육선교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양동교회의 교회교육 과 정명, 영흥 학교를 통한 민족교육의 결과는 1919년 3.1운동에서 드러났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은 일본식민지 지배체제의 완결이었습니다. 조선척식회사를 통 해 조선경제권을 완전 장악한 일본은 헌병과 경찰을 통해 폭력적 무단 통치를 시 행 하였습니다. 조선인을 개, 돼지처럼 무력으로 억압하고 불법적으로 착취하는 일제 의 만행해 조선 민중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 마침 1차 세계대전 후 미 국 대통령 윌슨이 선언한 약소 민족들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조선민족에 독립운 동 을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3.1운동은 일본에 유학한 조선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에서부터 저 멀리 북 간 도와 해외까지 빈들의 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국내에서는 전 계층이 전국적으로 들 고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목포에서도 3.1운동은 당시 양동 교 회를 중심으로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가 협력하여 이뤄나갔습니다. 그러나 여기 서 중요한 것은 양동교회는 민족의 독립을 위한 기도로서 3.1운동의 거사를 준비하 였 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고난받는 조선민중의 처참한 현실과 동족의 암울한 미래 를 바라보며 새벽기도 때마다 울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교인들은 이 민족 과 함께 하며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나아갈 길을 믿음으로 다짐하였습니다. 3.1운동은 목포에서 3월 21일에 일어났습니다. 양동교회의 교우들과 영흥, 정 명 여학교의 학생들이 비밀리에 준비한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거리로 나가 외 친것입니다. 이경필 목사가 앞장서고 양동교회 교우들과 학생들이 함께 행동하였 습 니다. “대한독립만세!” 조선 민족은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자주 민족이라는 것 을 외친 것입니다. 비 폭력적인 평화 시위였습니다. 그러나 일본경찰은 이경필 목 사 를 위시해서 200여명의 교인들과 학생들을 검거하고 그 중에 100여명을 구속하 였 습니다. 양동교회는 일제의 박해와 핍박 속에서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일제의 보 복 행위는 어느 종교 집단 보다도 한국교회에 집중되었습니다. 양동교회도 그 중에 하 나였습니다. 그 만큼 한국교회는 나라사랑이라는 민족신앙을 당시 굳게 가지고 있 었습니다. 복음은 국적이 없지만 복음을 믿는 자들은 국적이 있습니다. 3.1운동은 일제 의 억압과 착취라는 불의에 저항하였다는 측면과 다른한편 한국 조선인들의 자주적 이 고 자립적인 주체적 교회의 형성운동이라는 측면이 함께 있습니다. 양동교회 는 1910년 교인들의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자발적인 헌금으로 호남 최초의 아름다 운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의 건물을 세운 것이 아닙니다. 한 국 교회는 한국인의 손으로 세우겠다는 민족 독립과 경제적 자립의 의지를 모아서, 이 땅에 있지만 땅의 권력에 지배 받지 않는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