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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구원받은 이들은 예배와 기독교 교육을 통해 더 깊은 구원의 진리를 깨달아 갔 습 니다. 외적인 자유와 평등을 넘어 인간 각자에 깊이 쌓여있는 욕망과 그릇된 의 지 가 바로 인간을 차별하고 소외시키고 죽이게 하는 죄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깨달 았 습니다. 이것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은 성령의 사람 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한 이들을 성경은 하나님의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라 고 말하고 그러한 이들이 모인 곳을 교회 공동체라 말합니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집 단이 아닙니다. 성령을 통한 믿음의 선물을 받고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고 예 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familia dei)입니다. 교회는 가 정 과 같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두 기관입니다. 교회는 무엇을 받으러 오는 사회복지 기 관이 아닙니다. 받은 은총과 축복을 오히려 감사하며 시간과 물질, 재능을 드리 러 오는 기관입니다. 초기 양동교회를 세운 이들은 말씀의 은혜, 복음의 자유를 깨닫고 경험한 사람 들 입니다. 비록 고기잡이 출신의 무식쟁이라 할지라도, 신흥도시로 품팔이 온 농사 꾼 이라 할지라도 또는 잠시 머물다 가는 떠돌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깨 닫고 역사의 미래를 준비한 이들입니다. 복음을 통한 신분의 자유, 그리고 역사 에 대한 책임, 이웃을 향한 봉사가 이들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이 받 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병원을 통한 의료선교와 영흥학교, 정명 여 학교를 통한 교육선교를 활발히 전개 하였습니다. 2. 민족교육과 3.1운동 조선민족의 운동은 삼국시대부터 주변열강의 식민지로 삼기 위한 각축장이 되 어 왔습니다. 나당연합군을 통해 영토를 나누려는 계획은 청일, 러일, 그리고 1905 년 가츠라-테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과 미국사이에 이뤄졌습니다. 일본은 정한론을 가 지고 조선지배를 단계적으로 진행하여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 을 불법으로 장악함으로 실질적인 식민지배시대를 열었습니다. 단군왕검 이후 오천 년 의 역사가 무너졌습니다. 그것도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대륙문화 를 전달했던 왜구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것입니다. 치욕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기 에 책임적인 관료들과 지식인들은 자결로, 단식으로 목숨을 걸고 이에 저항하였습니다 . 양동교회가 주동이 되어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근대적 교 육 으로는 첫 사례였습니다. 1902년 목포 선교부에 스트레퍼(F.E.Straeffer) 선교사 가 한국인 조사 변창연의 도움을 받아 학생 15명을 모아놓고 정명여학교를 시작하 였 습니다. 영흥학교도 그 이듬해 1903년 벨 선교사의 사택에서 10여명의 학생들 을 모아놓고 시작되었습니다. 양동교회는 열심히 전도하여 1903년 이백여명을 수용 할 교회건물을 자립적으로 짓고 1906년에는 초대장로로 임성옥을 임직하여 당회를 구 성하였습니다. 1909년에는 한국인 윤식명 목사를 최초의 위임목사로 모시고 교 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