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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 즉 근대건축이다. 1900년을 몇 해 남겨둔 19세기 말, 당시의 목포는 개항장으로서 하루가 다르 게 도시가 확장되고 인구가 증가하는 개방적인 산업 도시였다. 당시 미국 남장로교 선 교사들이 1896년에 전남지역 선교사업의 전출기지로서 나주를 택했지만 후에 발 전 가능성이 확실한 지역으로 떠오른 목포를 최종 선교기지로 선택하게 되어 결국 이 지역에 선교, 교육, 의료 등 다양한 선진국의 근대문명이 빠른 속도로 정착하게 되 었다. 일본인들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과 신민지화를 위한 영사관, 경찰서, 동양척 식 주식회사 등과 같은 찬탈의 건축물을 주로 건립한 것과는 정 반대의 의미가 있다 . 역사적 건축물은 대상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3가지 가 치를 지니고 있다. 그 3가지는 역사적 가치, 예술적 가치, 그리고 감정 가치이다 . 양동교회와 구 선교사 사택은 이 3가지 가치를 고루 지니고 있는 근대문화유산 이 다. 목포 선교 유적이 주는 역사 및 건축적 의미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선교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양동교회는 1897년 처음 목포에 와 어려운 환 경속에서 전도 사업을 한 선교사들의 흔적 중 현존하는 최초의 건물이 기 때문이다. 이 유적을 계기로 목포 인근의 기독교 전래가 지속적으로 확 대 되었다. 둘째, 교육사적으로 의미가 있다. 당시 선교사들은 선교사업 뿐만 아니라 교육 사 업에도 큰 열정을 쏟았다.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는 1903년에 미국 남장로 교선교회 목포선교부에 의해 서립된 이 지역 최초의 근대학교다. 남성 조차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해안가 어촌에서 서양식 교육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셋째, 사회참여다. 양동교회 교인과 정명,영흥학교 학생들의 3∙1 만세 운동 참여 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형무소의 고난을 자처하면서 까지도 구국 운동 에 함께했다. 넷째,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양동교회 건물은 현존하는 목포의 석조건물 중 가장 건립년도가 빠르다. 인접한 목포의 석산에서 캐온 석재를 비교적 정교하게 가공하여 모더니즘건축 경향을 지어진 건물이다. 이후 목포의 학 교, 성당 등 큰 규모의 건축에는 주 구조로 석재가 사용됐다. 한편 구선교사 사택은 현재 내부는 비록 원형을 잃었지만 고증으로 건립 당시의 평면구조를 알 수 있어 당시 한국 내 서양인의 주거모습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건물이다. 당시 한국인들은 살림집은 나무와 흙으로만 짓는 줄 만 알았는데 돌로도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2000년 경 부터 근대유산에 대한 관심이 학계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도 커졌다. 그 일환으로 등록문화재 제도의 신설로 새로운 보존 및 활용의 방법을 제시 했다. 양 동교회도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12월31일에 등록문화재 제 114호로 지정을 받았고 정명여학교 교내에 있는 구선교사 사택(제 62호)도 일찍이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