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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2. 양동교회 창립과 초기 교회당 우리나라 근대기에 유입된 외래 건축물은 크게 서양 종교 (천주교, 기독교)를 통 해 서 들어온 것과 다른 하나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정을 통해서 이입 된 것으로 구 분할 수 있다. 이중 전자의 경우는 성당과 교회, 학원과 병원, 그리고 그들의 거 주 용 주택들로 이들은 한국 근대 건축의 저변 확대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본 양동교 회 도 목포의 근대도시로서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던 중요한 유적이다. 목포에서 처음 선교 활동을 시작한 것 은 1897년 3월 5일이며 선교사는 유진 벨(배유지)였다. 배유지를 도운 이는 군 산에서 선교 중이었던 조선인 변창연이 었다. 이들이 목포 선교의 첫 둥지를 텃 고 그 위치는 선교본부에서는 1896에 목포 선교부지로 미리 사둔 2,488평 현 양동 일대였다. 처음 예배당은 천막이였다. 이 천막교 회가 바로 이 지역 최초의 목포교회(현 양동교회)로 이 지역 기독교 역사의 새 장을 열게 했다. 다음해인 1898년 가을에 만복동 (현재의 양동 86번지)에 포교소 겸 선교사 주 택 을 건축하고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에 들어갔는데 당시 신도 20여명, 수세례자 7명 으 로 개항초기의 목포 인구 등 모든 것이 미약한 상황에서 그 실적은 결코 적은 것 이 아니였다. 당시 조선인 주요 신도로는 변창연 외에 노학주, 김만실, 임성옥, 지원근 , 마서규, 김치도 등이 있었다. 그 후 계속 신도수가 늘어나 1900년 가을에 한식 와 가 14평 교회당을 근접지에 신축했고 이곳도 비좁아 다시 1902년에 14평을 증 축 했다. 양동교회는 초대 배유지 목사 이후 2대에는 이눌서 목사, 3대에 다시 배유지 목 사, 4대 변요한 목사, 5대에 하위렴 목사가 맡았다. 이렇듯 설립 초기에는 미국 선 교사들이 교회를 맡아 운영했다. 한편 목포에 정착한 초기 선교사들은 선교와 함께 조선인 교육 및 의료 등에 도 관심을 갖었다. 그들은 1903년에 이 지역 최초의 서양식 교육기관인 정명과 영 흥 학교를 세웠으며 의료 사업으로는 1899년 봄에 의료선교사 오웬(오기면)이 와 기 독 교의 박애정신을 발휘했다. 사진 08. 설립초기 양동교회 교인 일동. 배 경 건물은 선교 초기에 지은 한옥 교 회당 (자료:목포양동교회 100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