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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철도가 개설되고 목포가 종착지가 되면 목포는 ‘선교전략 의 요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앞으로 잡다한 상업문화가 상륙하기 전에 기 독교 문화를 뿌리내려 정신을 무장 시켜야 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로써 전라도 내 륙은 물론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의 작은 섬들과 해안마을을 선교의 전진 기지로 삼 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7년 10월 1일 목포가 정식 개항이 되 면 서 목포 선교의 탄력을 받게 됐다. 한편 목포 선교가 시작되기 전인 1896년 2월 배 유지 목사와 이눌서 선교사는 선교 부지로 약 2천 5백여 평이나 되는 넓은 부지를 매입한다. 이는 목 포선교부의 설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곳 은 현재의 정명여자고등학교를 포함한 만복동(현재 양동 86번지 일대)일대로 공동묘지가 있는 야산이 었다. 벨 목사는 이곳을 “51달러를 주고 약 2에이 커의 면적을 가진 새로운 집을 짓기 위해 땅을 매 입하는데 성공했다.” 2) 고 그의 어머니에게 보낸 편 지에서 밝히고 있다. 배목사가 구입한 2에이커는 8,093평방미터(약 2,488평)로 큰 면적이였고 더욱 주목이 가는 것은 당시로 보면 목포 개항장에서 멀리 떨어진 외진 언덕진 곳에 자리를 마련한 것이 다. 지금으로 보면 먼 훗날을 고려한 상당한 부동산적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언덕 구릉지는 경관이 좋고 배수 등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목포 외에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처음 개척한 광주 양림동, 순천 매산동 등도 목포처럼 외곽 구릉성 산지의 경관이 좋은 곳이다. 2) 정명 100년사, p65. 2003. 정명여학교 사진 02. 배유지 목사 (자료:목포양동교회 100년사) 사진 03.전도 여행길에 나서는 배유지(우측)와하위렴선 교사(자료:목포양동교회 100년사) 사진 04. 서애온(스트래퍼)선교사 (자료 :정명 100년사)